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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의 세상 탐사] 이명박 정권의 기묘한 구사일생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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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호 02면

이명박 정권은 구사일생했다. 촛불의 지원을 받은 주경복 후보가 서울시 교육감으로 뽑힐 뻔했다. 그랬으면 호되게 당했을 것이다. 교육으로 정권 심판을 받을 뻔했다. 교육정책은 헝클어지고 정권 내부가 낭패와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촛불 세력은 반정부 위력을 과시할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이명박 정권을 구해준 1등 공신은 전교조를 거부하는 엄마들이다. 본지 주부 독자들의 표 분석은 이렇다. “주 후보가 되면 그를 밀었던 전교조가 수상한 이념교육을 시킬까 하는 불안감이 번졌어요. 그런 사태를 막겠다는 엄마들, 특히 강남권에서 끼리끼리 아줌마 방식으로 궐기한 것뿐이에요.”(C씨·43·도곡동) “주 후보가 촛불집회에 나가 박수 받았어요. 그 장면에 놀란 엄마들이 촛불 교육감 등장은 싫다고 투표장에 쫓아간 거예요. 보수 쪽 후보가 난립한 데다 낮은 투표율이면 주 후보가 될 거라는 예측은 그래서 빗나간 거지요. 그렇다고 공정택 후보가 좋아서 찍은 사람은 드물어요.”(K씨·39·신당동) 청와대는 그 학부모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런 엄마들의 은밀한 결속과 궐기가 예상치 않은 곳에서 촛불 세력의 기세와 야심을 절묘하게 꺾었다. 이들의 극성 덕분에 국정 침체의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있다. 여기에다 미국 지명위가 독도는 한국 땅이라고 원상회복했으니 호재가 겹쳤다.

어떻게 보답할 것인가. 촛불 공포의 악순환 탈출로 부응해야 한다. 반정부 촛불 공세→ 청와대 참모진의 위축→ 국정 표류와 비전 상실→ 지지층의 집단 실망과 대거 이탈의 순환 꼬리를 끊어야 한다. 국정 운영의 이치를 실감하는 게 우선 과제다.

경제는 경제만으로 살릴 수 없다. 경제 회복은 정치 안정과 법치의 울타리를 쳐 줘야 가능하다. 마거릿 대처의 영국병 치유는 그런 이치를 실천했기 때문이다. 노조의 거센 반발, 정권 내부의 혼선을 일관성과 신념의 리더십으로 돌파했다. 촛불 폭력시위를 겁내 법치를 팽개치면 서민이 먼저 피해를 본다. 법치가 살아 움직여야 민생은 안정된다. 광화문의 젊은 전경들에게 정권 수호 임무를 맡기는 무기력한 장면은 사라져야 한다.

신명이란 게 있다. 경제 회생을 위한 한국인만의 오묘한 심리적 요소다. 대중 동원의 결정적인 수단이다. 그 원리를 터득해야 한다. 외환위기 때나 지난해 태안 앞바다 기름 유출 사고를 기억하면 된다. 국민 사이로 신명이 번지니까 금 모으기에 앞장서고, 바위 덩어리를 씻으러 달려갔다. 신명만 나게 해 보라. 에너지 절약 운동은 연일 신기록을 세울 것이다. 에어컨 적게 틀고, 전깃불을 찾아다니며 끌 것이다.

왜 신명이 안 나는가. 이명박 정권이 편한 길만 가려는 것이 신명 생산의 장애 요인이다. 공기업 개혁은 다수 국민에게 친숙해진 국정 염원이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노조의 눈치만 본다. 장애물 없는 쉬운 길만 찾고 있다. 장관이나 청와대 참모들은 이 대통령의 개혁 비전을 실천할 전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정면돌파의 악역을 맡을 소신파도 없다. 민심은 그런 모습을 한심하게 여긴다. 신바람이 나서 정권을 밀어줄 리 없는 것이다. 경제 살리기의 횃불을 들려다가도 열불이 나서 내려놓는다. 신명을 일으키는 게 한국형 리더십의 최고 역량이다.

권력 내부가 신념과 역사관으로 재무장해야 한다. 정권 초기 “이념의 시대가 끝났다”며 실용을 아무데다 갖다 붙인 데서 국정 장악력은 허약해졌다. 김정일 정권이 있는 한 이념 갈등은 불가피하다. 반정부 세력은 순수했던 촛불에 반미와 폐쇄적 민족주의 이념을 집어넣어 극렬하게 변질시켰다. 그런 상황인데도 철학과 역사관 없이 실용에 집착하면 권력은 무능과 유약함에 빠진다. 지지 세력의 열정과 충성도가 떨어진다. 민심 파악을 하는 데 치열함도 부족해진다. 이명박 정권은 국정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이 찬스를 살리지 못하면 기약 없이 방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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