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월 광주, 불온한 상상력을 찬양하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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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호 06면

모두들 웃통을 벗고 땀 범벅을 하고는 뜨거운 숨을 토해 내고 있을 줄 알았다. 얼음 몇 덩어리 띄운 세숫대야가 유일한 냉방 장치일 줄 짐작했다. 중복(中伏) 폭염이 아스팔트를 녹이던 지난달 29일 오후 정릉 골짜기 깊숙한 곳에 자리한 ‘극단 그린피그(greenpig)’ 연습실 앞에 섰을 때 문을 열면 이런 장면이 펼쳐지리라 상상했다. 연극쟁이들의 뚝심이라면 30도 더위쯤이야 뭔 대수냐 싶었다.

연극 ‘충분히 애도되지 못한 슬픔’ 연습 현장

살짝 손잡이를 돌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서늘한 에어컨 바람이 이마에 와 닿았다. 상가 건물 3층 마룻바닥은 깔끔했다. 느른한 오후 햇살 아래 연습에 몰두하고 있는 배우들도 멀쩡했다. 방문자는 ‘불온한 상상력’에 기대 제멋대로 생각한 사실을 단원들 앞에 고백했다. 연출가 박상현(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 교수)씨 맞장구가 걸작이다. “아니 어떻게 알았어요? 우리 극단이 지향하는 바가 ‘불온한 상상력’인데.”

극단 그린피그(대표 윤한솔) 단원들은 8월 1일부터 10일까지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무대에 오르는 연극 ‘충분히 애도되지 못한 슬픔’(평일 오후 8시, 주말 오후 3시·7시, 문의 070-7594-4406)을 마무리하느라 한창이었다. 두 달 전부터 이 연습실에서 살다시피 한 배우 12명과 스태프 10명은 종착역을 향해 달리는 기관차처럼 씩씩거리며 돌진하는 모습이었다.

박상현 연출은 “창문을 열고 연습하면 위아래 층에서 시끄럽다고 난리라 울며 겨자 먹기로 쌈짓돈을 털어 중고 에어컨을 장만했다”고 털어놨다. 신흥 졸부 모습을 한 뮤지컬 계를 논외로 하고, 연극 동네의 돈 가뭄이야 이골이 난 얘기지만 그래도 바득바득 연극을 더 움켜잡는 이런 이들 덕에 한국 연극은 죽지 않는다.

2006년 10월 ‘자객열전’을 공연하며 출범한 극단 그린피그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새로운 연극, 우리 문명을 고민하는 연극을 하고자 모인 집단이다. 2년이 채 안 된 신생 극단이지만 모인 이 면면은 듬직하다. 연극판에서 잔뼈가 굵은 단원들은 대부분 30대 후반과 40대에 들어섰지만 여전히 아르바이트 일로 집안을 꾸려 간다. 박상현 연출은 “사정이 어려운 줄 알지만 영화판에 얼굴 디밀지 말라는 조언을 꼭 한다”고 전했다.

‘충분히 애도되지 못한 슬픔’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창작극 부족으로 허덕이는 연극계를 위해 새로 마련한 ‘창작희곡 활성화 지원사업’인 ‘창작예찬’에 선정된 신작이다. 일간지 신춘문예 시·소설 두 부문을 거머쥐고 희곡 장르까지 접수한 작가 최치언씨는 면도날 같은 언어 구사로 1980년 5월 광주를 우리 곁으로 불러온다.

왜 또 80년 5월 광주냐고? 최 작가는 거침없이 대답한다. 연극 제목을 되새김질하라고. 연습실 선반에 놓고 단원들이 돌려보는 이창성 사진집 『28년 만의 약속』(눈빛 펴냄)이 또한 답일 수 있겠다. 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중앙일보 사진부 기자였던 이씨는 시민군 지휘부의 취재 허락과 협조를 얻어 아무도 찍지 못했던 ‘광주공동체’ 시기의 시민군 활동과 광주 시가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하지만 이 사진이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28년이 걸렸다. “역사를 기록해 후세에 남기겠다”는 시민군과의 약속을 지킨, 한 저널리스트의 신념이 극단 그린피그의 불온한 상상력에 불쏘시개가 된 셈이다.

주인공은 이른바 ‘3인조 자해 공갈단’이다. 중학교 때 ‘오거리파’로 함께 뒹굴던 허장세·오광세·민방세 세 친구는 80년 5월 광주에서 간첩과 빨갱이 잡는 모종의 세력과 얽히면서 피할 수 없는 한판 대결을 펼친다. 누구도 어쩔 수 없는 비극적 상황을, 아들을 잃은 경찰관은 이렇게 매듭짓는다. “돌아들 가시오. 경찰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모두 다 무사하길 바랄 뿐이지.”

하지만 그 현장은 모두 다 무사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어떻게 이런 거짓말 같은 일이 있을 수 있죠? 시민들 편은 누군가요?”라고 묻던 간호사는 울부짖는다. “진정제가 필요해! 우리 모두한테 진정제가 필요하다고!”

극적인 사건 전개를 따라가던 관객은 ‘아, 우리는 그때 그 슬픔을 충분히 애도하지 못했구나’ 싶어 마음이 불편해진다. 다양하게 펼쳐지는 영상 자료의 과잉, 엄청난 양의 대사를 쏟아내느라 살짝 처지는 기미가 보이는 극의 진행은 그래서 더 이 극이 도발하고 싶은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제발 ‘충분히’ 좀 애도할 수는 없겠느냐고.

한때 정신병원 신세를 졌던 민방세는 지구를 침략하려는 외계인을 감시하라고 의사들이 자신의 머리카락 속에 광섬유 물질인 안테나를 이식했다고 믿는다. 방세의 외계인설을 헛소리라 무시하던 나머지 두 사람은 결국 친구의 말을 믿게 된다. 이들이 본 외계인은 누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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