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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어려울 때 생각나는 사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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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조선 개국 당시 개성 사람들의 운명이 어땠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역성혁명에 끝까지 저항했던 이들이 개성 사람들이다. 핵심 세력들은 개성 광덕산 인근 두문동으로 들어가 새 왕조 참여를 거부했다.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마저 생겼다. 개국 세력들은 산에 불을 질러 이들을 흩어지게 했다. 이것으로도 분에 안 찼는지 개국 후 100여 년 동안 개성 사람들이 과거를 치르는 것을 금하게 했다. 서북송탐(西北松耽)이라 해서, 개성 외에 서북 지방과 탐라 등도 그 대상이 됐다.

이들은 관계 진출을 포기한 대신 상업을 선택했다. 조선시대, 혹은 우리 역사를 통틀어 가장 조직력이 끈끈하고 생활력이 강했던 개성상인의 출발점이었다. 이후 이들은 방방곡곡에 뿌리를 내렸다. 대개 밑천이 따로 필요 없는 장돌뱅이, 보부상 형태였다.

경제가 어려워지기만 하면 개성상인들을 그리워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이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혼자 힘으로 부를 일궜기 때문이다. 외환 위기 때도 개성상인들의 상관습과 절약정신을 본받자는 운동이 일었다. 개성상인의 전통을 이어온 기업의 상술을 배우자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도 그럴 게 당시 위기의 진원지는 지나치게 부채를 많이 끌어다 쓴 우리 기업들이었다. 반면 지금은 빚더미 위에 올라앉은 우리 가정 경제가 문제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들은 개성상인의 어떤 면을 배워야 할까.

우선 개성상인들은 무리한 투기를 일삼지 않았다. 안전한 일에 전력했다. 훗날 피혁업 종사자들을 일컬어 ‘갖바치’라고 하게 된 것도 개성상인의 상술에서 유래했다. 조선시대 권문세가에게 가죽 신발은 권위의 상징이었다. 개성상인들은 이들에게 납품을 했지만, 돈을 떼이는 일이 많았다. 그러자 먼저 돈을 받고서야 주문을 받는 전통을 만들었다. 값을 미리 바쳐야 제품을 구한다고 해서 갖바치라는 말이 생겨났다.

개성인들의 삶도 비슷했다. 고리대금업 같은 것에 한 눈을 팔지 않았다. 자산시장의 거품이 꺼지는 요즘 우리도 비슷한 태도가 필요하다. 떼돈을 벌겠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투기는 물론 과도한 투자를 자제해야 한다. 누군가가 1년 안에 원금을 두 배 가까이 불려주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혹하기보다 차라리 신고를 하는 편이 낫다. 정당하게 큰 돈을 벌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둘째, 지나친 빚을 경계해야 한다. 초창기 개성상인들은 빚을 얻을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베 한 필, 미역 한 뭇 정도만 들고 장터로 나섰다. 훗날 부를 축적하고 신용을 얻은 다음에는 개성상인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빚을 낼 수 있었다. 그들은 한사코 빚 내기를 주저했다. 송사라도 당할라치면 자신들이 불리한 처지에 설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설령 어렵게 살지언정 남한테 아쉬운 소리는 하지 말자는 것이 개성상인의 문화였다. 2000년대 초반 신용카드로, 최근 몇 년 주택담보대출로 빚더미를 자초했던 우리가 돌아가야 할 삶의 자세다. 마지막으로 개성상인들은 검소한 생활로 유명했다. 1년에 한두 번 가장이 돌아왔을 때나 좋은 밥상을 내왔을 정도였다. 다른 날에는 찬이 세 가지를 넘지 않았다. 세계 최초의 부기라는 찬사를 듣는 사개치부책(四介置簿冊)은 상업활동을 구체화하고 이를 전수하기 위한 것이지만, 검소한 생활을 위한 목적도 있었다. 개성상인들의 단순하고 소박한 삶의 미덕을 다시 생각할 때다.

김방희 KBS 1라디오 ‘시사플러스’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