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고

철학을 한다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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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아이들은 어느 나이에 이르면 무차별적으로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아들 녀석도 다른 아이들처럼 그런 단계를 지나던 때가 있었다. “왜 줄을 서야 해?” “왜 나뭇잎은 초록색으로 보이는 거야?” “천국은 어디에 있는 거야?”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심정이 복잡하다. 꼬마 철학자의 도전에 철학교수의 직업의식으로 열심히 대응한 적도 있었지만, 바쁜 일상에 지쳐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기도 하였다. 나는 비겁하게 당시의 책임을 미래로 미루며 너를 위한 철학책을 쓰리라고 약속했다.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항상 철학을 가르친다는 것, 철학을 배운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생각해 왔지만 그 경험은 이런 질문을 구체적으로 되돌아볼 특별한 계기를 나에게 주었었다.

그날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미안함은 아직도 갖고 있지만, 철학 교육의 의의에 대해 나는 그날 이후 조금도 의심해본 적이 없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길들여진다. 다양한 행동방식과 사고방식은 문화와 전통이라는 장인의 손을 통해 사회화의 과정을 거쳐 일정한 정도 정돈이 되어 질서를 낳는다. 질서 없이는 사회가 존속할 수 없으니, 길들여짐을 맹목적으로 비판할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맹목적인 추종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맹목적인 추종은 맹목적인 비판보다 더 큰 해악일 수 있다. 현대사회는 극도의 유동성 속에 놓여 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사회체제를 급속도로 변화시키고 있으며, 급속도로 진행되는 세계화는 기존의 사회체제들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기존의 사고방식에 매달리는 사회는 더 이상 생존할 수 없다.

유동적인 사회 상황에서 철학적 훈련은 빛을 발한다. 철학은 기존의 사고방식에 대한 끝없는 반성을 생명으로 한다. 기존의 사고 틀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를 드러내고, 그 내용이 옳은지를 되돌아본다. 또 옳다면 어떤 조건에서 옳은지를 검토한다. 학생들이 철학 수업을 통해 기존의 사고방식을 되돌아보면서 혼란에 빠졌다가는, 다시 반성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정립해가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을 나는 수없이 보아왔다. 이런 훈련을 거친 학생들은 통념을 벗어나 창의적 사고의 선봉에 설 수 있으며, 한 사회를 지배하던 생각들이 도전 받고 흔들릴 때 당황하지 않을 수 있다.

얼마 전 뉴욕 타임스는 요사이 미국에서 많은 학생이 철학과로 몰리는 현상을 다룬 적이 있다. 그 기사의 진단도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법학대학원(로스쿨) 가기에 유리하기 때문에 몰리는 것이 아니라, 유동적 현대사회에서 필요한 사람을 배출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철학에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창의적이며 유연한 사람을 배출하는 데 도움이 되는 교육을 대학에 와서야 시작할 이유가 없다. 둘째아이와는 좀 더 인내심을 갖고 철학적 대화를 해야겠다. 첫아이에게 지키지 못한 약속을 둘째에게라도 지켜야겠다.

한참의 세월이 지난 요사이 나는 또 다른 차원에서 철학과 특별한 대면을 하고 있다.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짐을 지고 산다. “당신의 연구가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인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철학은 시대의 산물이기에 나름의 문화적 특성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이 질문은 다른 학문에서는 전혀 제기되지 않거나, 제기되더라도 철학의 경우처럼 큰 무게로 다가오지 않는다. 쓸데없는 질문이라고 부정하며 전문가로서의 일상에 안주하면서도 어딘가 개운치 않은 데가 있었다. 세계에서 수천 명의 철학자가 모이는 세계철학대회 조직위원회의 주체로 행사를 준비하다 보니 유사한 질문들이 나를 다시 괴롭히기 시작한다. 세계에서 한국 철학의 위상은 무엇인가? 우리는 세계 곳곳의 사람들을 모아놓고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가?

유럽과 북미를 오가며 세계최대 규모로 5년마다 한 번씩 열리던 세계대회가 아시아 처음일 뿐만 아니라, 유럽 문화권 밖에서 처음으로 한국에서 열리게 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세계 속에서 아시아의 위상이 제고되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철학계가 아시아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를 유지함과 동시에 다른 아시아 국가들보다 앞서 서양철학계와 호흡을 맞추어 왔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더군다나 서양철학의 발상지인 그리스와 치열한 경합 끝에 대회를 유치한 것은 더욱 인상적인 일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숙제는 나름의 고유한 철학적 담론도 구성하면서 세계적 수준의 철학으로 발전하는 일이다. 세계의 무대에 미약한 발을 내디딘 지 30∼40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이루어낸 성과에 빗대어 조심스럽게 낙관론을 제시해 본다.

김기현 서울대 철학과 교수·세계철학대회 한국조직위원회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