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1> 대학은 큰 스승이 있는 곳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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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줄 왼쪽부터 판광단·뤄자룬(羅家倫)·메이타이치·펑여우란·주쯔칭(朱自淸). 김명호 제공

서남연합대학에는 총장이 없었다. 세 대학의 총장이 상임위원이었다. 베이징대와 난카이대 총장은 임시 수도 충칭에 상주하다시피 했다. 칭화대 총장 메이타이치(梅胎琦) 혼자 대학을 끌고 나갔다. 그가 총장이나 다름없었다.

판잣집에 양철 지붕을 덮은 기숙사와 교실·실험실 등 82채의 건물을 짓는 데 1년이 걸렸다. 윈난성 주석 룽윈(龍雲)의 지원을 받았는데 예산이 부족해 창문은 있었지만 유리는 끼지 못했다. 그래도 설계자는 량치차오의 아들인 세계적인 건축가 량스청(梁思成)이었다.

메이타이치는 1930년대 입학생들에게 ‘대학은 큰 건물이 있는 곳이 아니다. 큰 스승이 있는 곳이다’라는 명언을 한 교육자였다. 그는 통재(通才)교육의 신봉자였고 교수치교(敎授治校)의 제창자였다. 실용교육을 경멸했다. “한 가지 재능만 갖추면 된다는 식의 교육은 장인을 배양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대학이 할 일이 아니다” “대학은 교수들이 모든 일을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고 항상 말했다. 학습환경 보장 외에 그 어떤 것도 정부에 요구하지 않았고, 간섭도 허용하지 않았다.

39년 교육부는 교과 과정과 교재의 통일, 연합고사 실시를 교육부장 훈령으로 모든 대학에 통보했다. 서남연대는 철학과 교수 펑여우란(馮友蘭)이 ‘대학은 교육부의 일개 과(科)가 아니다. 훈령대로 한다면 교수는 교육부 직원과 다를 바 없고, 교과과정을 교육부가 정한다면 부장이 바뀔 때마다 창조와 개혁을 들먹이며 무슨 변덕을 부릴지 모른다.

연구를 진행할 수 없고 학생들에게 혼란을 준다. 바꾸기만 하면 좋아진다는 발상을 이해할 수 없다’는 서신을 교육부에 발송했을 뿐 대학 명의로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삼민주의를 교과목에 넣는 데는 동의했다. 단, 시험을 치르지 않았고 학점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교육부의 교수자격 심사를 거부했고, 학장들은 필히 국민당에 가입하라고 했을 때도 응하는 교수가 없었다.

교수들의 생활은 빈곤했다. 일본군의 공습으로 유통이 원활치 못한 데다 인플레로 인해 한 달 급료는 전쟁 전에 비해 2% 정도의 구매력밖에 가지지 못했다. 부양가족이 8명이었던 원이둬(聞一多)는 밤마다 주문받은 도장을 팠고, 메이타이치의 부인은 사회학자 판광단(潘光旦)의 부인과 함께 빵을 만들어 제과점에 납품했다.

핵 연구에 불멸의 업적을 남긴 화학과 교수 자오중야오(趙忠堯)도 직접 만든 비누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후일 중국의 핵무기 개발에 참여하는 인재들을 키워냈다. 그러나 교육부가 보직 교수들에게 특별판공비를 지급했을 때 서남연대 교수들은 ‘국난의 시기에 가당치 않다. 보조금을 받으면 마음이 편치 않다’며 돌려보냈다.

빈곤보다 더 두려운 게 일본군의 공습이었다. 38년 9월 1차 쿤밍 공습이 있었고, 40년부터 43년까지 공습이 빈번했다. 수업 도중 경보가 울리면 교수나 학생 할 것 없이 모두 후문 뒷산으로 냅다 달려야 했다. 공습경보와 함께 뛰어 달리는 것은 교수와 학생의 공동필수 과목이었다. 경보가 긴 날은 산속에서 수업을 했다. 진위에린(金岳霖)은 산으로 뛰는 도중 67만 자에 달하는 ‘지식론’의 원고를 분실했다. 다시 쓰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41년 8월 공습으로 기숙사와 식당·도서관이 파괴됐다. 교수 대부분이 교외로 이사했다. 물리학과 교수 우다요우(吳大猷)는 마차를 얻어 타고 학교에 오다 굴러 떨어져 뇌진탕으로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날도 마차를 타고 나와 토굴 속에 손수 만든 실험실에서 수업을 강행했다. 이때 키워낸 제자 중 두 명이 후일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서남연대 교수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대학의 자율이 보장되는지, 학문과 사상의 자유가 침해받지 않는지, 권력의 애완견이나 금력의 노예가 되지 않는지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전시에 기라성 같은 인재들을 배출한 서남연대의 기적은 우연이 아니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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