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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60주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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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치스차코프 사령관(왼쪽 의자에 앉은 사람)이 45년 8월 24일 함흥에 도착해 환영 군중을 바라보고 있다. [중앙포토]

 1945년 8월 26일 평양 미림비행장.

“우리는 우리(소련)의 질서를 당신들께 강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들을 보호할 것이며 당신들의 새 사회 건설을 도울 것입니다.”

환영 나온 평양시민들에 둘러싸인 치스차코프 소련 25군 사령관은 마이크 앞에서 자신들은 점령군이 아니라 해방군임을 강조했다. 일본 식민지에서 갓 벗어난 시민들은 환호로 답했다. 올해로 정부 수립 60주년을 맞는 북한 정권의 밑바탕이 된 소련군정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당시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며 유럽 전선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었다. 전쟁 상대인 일본 역시 패망 직전이어서 한반도에 들어온 소련 군대는 정예병이라기보다 급조된 측면이 강했다. 이 같은 정황은 치스차코프 사령관의 행보에서도 나타난다.

1945년 8월 24일 평양으로 갔어야 할 그였지만 비행기는 함흥으로 향했다. 함흥에 진주한 소련군을 치하하려는 의도로 볼 수도 있지만 뭔가 착오가 있었다. 정창현 국민대 겸임교수는 “치스차코프가 평양이 아닌 함흥으로 향한 것은 함흥을 북한의 중심으로 알았기 때문”이라며 “이는 소련이 세부적으로 준비가 덜 됐던 것임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소련군정은 미군정보다는 유리한 입장이었다. 정 교수는 “소련군이 진주했을 때 38선 이북에는 이미 좌익 중심의 인민위원회가 구성돼 있었다”며 “소련은 인민위원회의 활동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이를 통해 각 지역에서 지방행정기구를 순조롭게 구축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소련군정이 자리를 잡고 모스크바 3상회의를 거치며 북한의 전략적 가치는 높아만 갔다. 안보 전략적 차원에서도 소련에 우호적인 정권이 북한에 자리 잡는 게 필요했던 것이다. 46년 찬·반탁 논란을 거치면서 조만식 선생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도 서서히 거세됐고, 46년 2월 8일 조직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위원장 김일성)는 소련군정의 틀이 완성되는 계기였다.

소련은 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임시정부 수립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소련군정과의 긴밀한 협의를 거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46년 3월 토지개혁, 11월 3일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 등을 발 빠르게 추진해 나갔다.

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 수립에 이어 48년 2월 인민군 창건 단계에 이르면 북한 지역에는 사실상 행정부와 군이 완성됐다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정용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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