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문의 바둑 명인열전 ③ 우칭위안과 4개월 혈투 ‘2집 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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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중국의 천재기사 우칭위안(左)과 일본 슈사이 명인의 대결은 대인기였고 수많은 화제와 사건을 낳았다. [한국기원 제공]

1930년대 초의 일본은 군국주의의 전면 등장으로 몹시 술렁거리던 시절이었다. 온건파인 이누카이(犬養) 총리가 암살되고 마키노(牧野) 내대신이 피습되었다. 이누카이는 슈에이의 지우로, 일본기원 명예회원이었고 마키노는 일본기원 총재를 겸하고 있었다. 그해 일본기원이 발행하는 바둑지엔 이런 추도사가 실렸다.

“세상이 험악하다. 이 혼탁한 분위기를 숙청하기 위해서는 국민 모두가 기리(棋理)를 터득하는 길이 있을 뿐이다. 명세가들아, 바둑을 배워라!”

바로 이 무렵 일본 전통 바둑의 계승자라 할 슈사이와 중국에서 온 젊은 천재기사 우칭위안(吳淸源)이 맞붙었으니 이 대결이 단순한 바둑 대결로 끝날 리 만무했다.

우칭위안은 14세 때 일본에 나타났다. 신포석을 연구해 실전에서도 승승장구했다. 구시대의 대표라 할 슈사이는 기회있을 때마다 신포석을 비판했다. 이 무렵 바둑으로 재미를 크게 본 요미우리신문은 다시 5단 이상의 기사를 총동원해 선수권전을 연 다음 그 우승자를 슈사이와 대결시키는 기획을 내놨다. 우승자는 공교롭게도 우칭위안. 이리하여 32년 10월, 슈사이-우칭위안의 일전이 막을 열었다. 제한시간은 각 24시간. 치수는 우(吳)의 선. 51세의 슈사이가 21세의 천재 우칭위안을 상대로 선을 접고 대결을 시작한 것이다.

슈사이-우칭위안의 대국보. 우칭위안은 본인방가의 귀문인 삼삼에 첫 수를 두고 화점, 천원을 대각선으로 연결하는 전대미문의 포석을 들고 나왔다. 11과 13은 당시 연구 중인 신포석의 흔적.

일본 열도는 이 한판으로 들끓었다. 더구나 우칭위안이 대국을 시작하자마자 첫 수를 ‘삼삼’에 두고 다음 수로 화점과 천원을 대각선으로 연결시키는 전대미문의 포석을 들고 나오는 바람에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삼삼은 오랜 세월 본인방가의 귀문(鬼門)이었다. 말하자면 두어서는 안 되는 수였고 가문의 금기사항이었다. 본인방가의 문하생들은 당장 “명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며 비판하고 나섰다. 슈사이조차 “전통에 대한 의식적인 도전”으로 느꼈다고 한다. 게다가 멀리서는 중국과 일본이 한창 전쟁 중이었으니 바둑판과 전쟁이 오버랩돼 대국자는 점점 더 필사적이 되고 구경꾼도 점점 더 흥분하게 됐다.

바둑은 4개월간 14회에 걸쳐 두어졌 다(14회 모두 백이 둘 차례에서 중지되었다. 막부 시대부터 명인은 바둑을 중지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자신이 둘 차례에서 중지함으로써 나이가 들어서도 수많은 도전자를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판은 선 바둑, 즉 덤이 없는 바둑이지만 14회나 중지했다는 것은 덤 이상의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형세는 계속 팽팽했다. 나중엔 오히려 흑이 좋아졌다. 열렬 팬들은 명인의 비세를 안타까워했고 어느 날엔 우칭위안의 집에 돌이 날아드는 사건도 벌어졌다. 우칭위안에겐 모든 게 부담이었다. 바둑은 흑이 유망하다 싶은 순간 금성철벽 같은 흑진 속에서 묘수가 등장해 슈사이의 2집승으로 끝난다. 슈사이의 투혼은 극찬을 받았고 불패의 명인으로 추앙받았다. 대국이 끝난 며칠 후 우칭위안의 스승 세고에 7단은(그의 마지막 제자가 조훈현 9단이다) 기자들에게 “승착이 된 슈사이 명인의 묘수는 명인이 발견한 게 아니라 문하생인 마에다가 발견한 것”이라고 말했고 이 발언은 각 신문에 다양하게 포장돼 대서특필되었다. 이에 본인방가는 전 문하생이 들고 일어나 세고에의 ‘망언’을 규탄했으며 세고에는 결국 바둑계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나이에 비해 수양이 깊은 우칭위안은 패배에 대해 일절 변명하지 않았다. 수십 년 세월이 흐른 후 그는 수필집에 이렇게 적었다.

“세상의 오해가 있었지만 나에겐 추억의 대국이다. 눈을 감으면 바둑판 앞에 눈을 번득이는 명인의 모습이 있다. 당시 나는 머리를 숙이고 언제까지나 입을 다문 채 이 기분을 무덤까지 가져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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