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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지하 ‘상황실’ 벙커도 날아갈 뻔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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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 04면

‘작은 정부’를 향한 이명박 정부의 신념은 청와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청와대 인수팀은 국가안보 분야의 컨트롤 타워를 맡던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비상설기구로 바꾸고 NSC 사무처는 폐지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NSC 사무처 산하에 있던 종합상황실마저 덩달아 해체될 운명에 처한 것이다. 청와대 조직개편 작업에 관여했던 정부 관계자는 그때 분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아무리 조직을 줄이더라도 반드시 필요한 기능은 남겨두는 게 당연한데, 청와대 관계자 어느 누구도 벙커 얘기는 하지 않더라고요. 지하 벙커가 그렇게 중요한 곳인 줄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하에 있다 보니 아무도 챙기질 않았던 거죠.”

이명박 정부 위기관리 시스템, 그 취약함의 실상

또 다른 관계자는 “청와대 사람들과 조직개편 협의를 하는데 ‘위기관리는 총리나 일선 부처에서 맡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말만 하더라. 정부조직을 새로 짜면서 위기관리에 대한 마인드는 전혀 없는 것 같았다”고 전했다.

문제는 지하 벙커의 전원을 끄기는 쉽지만 다시 켜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종합상황실에서는 원전 가동 정보, 한강 오염 상황 등 20여 개 주요 상황정보를 실시간으로 체크할 수 있다. 국가 위기를 담당하는 23개 부처와는 핫라인으로 연결돼 있다. 한반도 주변 반경 360㎞ 내에서 운행하는 모든 비행기의 움직임도 추적 가능하다. 북한 전투기는 물론이다. 그야말로 대한민국 위기관리의 심장부인 셈이다.

이 모든 업무는 군ㆍ경찰ㆍ소방 전문가들이 3교대로 돌아가며 맡는다. 분초를 다투는 상황에서 고도로 숙련된 전문인력은 상황실 운영의 필수조건이다. 그런데 위기관리센터가 공중분해되면서 전문요원들도 짐을 싸야만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이 같은 청와대 조직개편안이 가시화되자 이곳저곳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외교안보 부처에서도 존속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청와대 담당자들이 실상 파악에 나섰고 지하 벙커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팀장 직급이 1급 비서관에서 2급 행정관으로 격하되고 총 인원은 23명에서 15명으로 줄었다. 소속도 대통령 직속에서 대통령실장 산하로 옮겨졌다. “6개월 지켜본 뒤 존속 여부를 결정한다”는 꼬리표도 달렸다. 이런 상황에서 금강산 피격 사건 같은 긴급사태가 발생했을 때 신속한 대통령 직보는 애당초 기대할 수 없었다.

시스템은 사라지고 대통령만 과부하
지하 벙커 폐쇄 논란은 청와대 위기대응 체계의 난맥상을 드러내는 단적인 사례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더욱 심각한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다. 가장 많이 지적되는 게 ‘시스템의 부재’다. 현재 이명박 대통령은 대략 여섯 곳으로부터 직접 대면보고를 받는다. 국가정보원ㆍ기무사ㆍ경찰이 주요 직보 채널이다. 청와대 내에서도 기획관리비서관실(옛 기획조정비서관실)ㆍ민정수석실ㆍ정무수석실이 각각 정보를 취합해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이전 정부와는 확연히 달라진 모양새다. 노무현 정부 때는 NSC 사무처가 각 부처에서 올라오는 정보를 1차로 모아 종합 분석한 뒤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에 비해 현 정부는 모든 보고체계가 오로지 대통령에게만 집중돼 있다. 김용호 인하대 교수는 이를 ‘방사형ㆍ권위적 조직 운영체제’라고 특징 지었다.

이 대통령의 ‘만기친람형’ 스타일도 직보 체제 부활과 의사결정 권한 집중의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다. 대기업 최고경영자(CEO) 출신인 이 대통령은 모든 걸 사소한 것까지 꼼꼼히 챙기는 성격이다. 그러다 보니 아랫사람으로의 권한 위임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대통령은 24시간 보고만 받는 자리가 결코 아니다. 1차로 추려진 핵심 정보를 바탕으로 신속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모든 걸 혼자 판단하고 결정하려면 할수록 청와대 내부의 동맥경화 현상은 심화되고 대통령 본인에게는 점점 더 과부하가 걸리는 악순환 구조가 불가피하다. 시스템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면서 ‘대통령 1인 집중’이 화를 키워 가는 형국이다. 이는 각 부처에서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긴급 상황정보를 책임지는 컨트롤 타워의 부재로 이어지고 있다.

대통령의 ‘엄한 CEO’ 이미지를 거론하는 사람도 많다.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금강산 피격 사실을 2시간 동안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못한 것도 비서관들이 대통령 앞에서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지금의 청와대 구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란 지적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참모들과 스스럼없이 맞담배를 피우며 ‘맞장 토론’을 즐긴 것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노 전 대통령이 시스템 만능주의자로서 한계를 노출했다면 이 대통령은 1인 만능주의라는, 어찌 보면 더욱 심각한 함정에 빠져 있는 셈이다.

제대로 된 보완책 나올까
위기관리 시스템을 더욱 취약하게 만드는 요인이 하나 더 있다. 현 정부 외교안보 라인의 문제다. 역대 정부가 외교안보 분야의 인적 구성에서 반드시 지켜왔던 원칙이 하나 있다. ‘견제와 균형(check & balance)’이 그것이다. 외교관과 비외교관, 미국 전문가와 북한 전문가, 관료와 학자 등을 적절히 배치해 균형 잡힌 정책결정을 가능케 했다.

하지만 지금의 라인업을 보자. 외교통상부 장관, 주미대사,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에 통일부 장관까지 모조리 직업 외교관 출신이다. 총리와 총리실장마저 외교부 장·차관 출신이다. 통일ㆍ북한 전문가는 단 한 명도 없다. 동종교배의 결과는 브레이크 없는 액셀을 밟는 것처럼 치명적이다. 금강산 피격 사태가 터지자 허둥지둥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그러는 사이 정부조직 개편 때 폐지 일보직전까지 갔던 통일부가 불과 몇 달 만에 컨트롤 타워로 재부상하는 아이러니한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다.

현 정부의 ‘ABR(Anything but Rho)’ 정책 기조가 위기관리 시스템을 엉망으로 만드는 데 한몫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회 위기관리포럼 대표인 한나라당 공성진 최고위원은 “인수위가 섣부르게 과거를 무조건 부정하려고만 했던 게 실책”이라며 “이전 정권이 운영을 잘못해 그렇지, NSC처럼 필요한 제도는 과감히 이어갔어야 했다”고 비판했다. 함성득 고려대 교수는 “새 정부 들어 완전히 새로운 위기관리 시스템을 도입하려 했지만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상태에서 돌발사태가 터지면서 불가피하게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청와대는 “새로운 시스템을 정착시키려 해도 10년 햇볕정책에 길들여진 관료들이 도통 움직여 주질 않는다”고 하소연한다. 하지만 새 정부가 출범한 지 다섯 달이 돼 가는데 그런 변명은 한가롭기만 하다. 청와대는 조만간 위기정보상황팀 개선 방안을 포함해 재발 방지를 위한 구체적인 보완책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어떻게 보완될지 지켜볼 일이다. 하지만 과연 청와대가 현 상황에 대한 치열한 자기반성을 하고는 있는 것인지, 변화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기는 한 것인지 그것부터가 의문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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