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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서 쇼핑하는 것의 즐거움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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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 35면

지하철에서 ‘자외선 차단 팔 토시’를 샀다. 이걸 반길 것 같은 사람이 둘 떠오른다. 과수원을 하는 선배, 그리고 자전거 타기를 즐기는 친구. 지하철에서는 솔깃한 물건을 많이 판다. 가격 착한 아이디어 생활용품들로서 딱 내 취향이다. ‘맨살보다 시원한 탁텔 소재로 착용감 탁월’하다는 팔 토시를 꺼내 한쪽 팔에 끼워 보고, 다시 잘 포장해 상자에 던져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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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는 오이나 감자를 얇게 써는 ‘오이 미용기’, ‘따끈따끈 손난로’, 스프링 귀이개, 두피 마사지기, 집어던질 때면 번쩍번쩍 빛이 나는 요요, 다섯 장씩 엮은 흘러간 팝송 세트와 흘러간 가요 세트 등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들어 있다. 흘러간 팝송 세트를 처음 샀을 때 그 상인이 카트에 싣고 다니는 오디오에서 ‘스탠바이 유어 맨’이 흘러나왔는데, 가슴이 뭉클했다. 그 노래를 한창 듣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치밀어 올라 그랬던 것 같다. 수록 곡목을 보니 주옥같은 명 팝송들이었다. 그래서 상인에게 명함을 달라 청해서 그 명함에 적힌 주소를 보고 동대문 근처 건물을 찾아가 두 세트 더 샀다. 팝송 좋아하는 친구들한테 생색내며 주기 위해서였다. 그 뒤 지하철에서 그걸 파는 상인을 볼 때마다 서너 번 더 샀는데, 어째 음질이 전만 못한 것 같아 시들해졌다.

프레데리크 페르넹의 에세이집 『쇼핑의 철학』은 쇼핑을 ‘소비와의 유희’라 정의한다.

“물론 그녀는 ‘장을 보듯이’ 쇼핑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는 ‘유용성’을 찾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필요에 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행동은 이미 미학적 관계를 닮았다.” (『쇼핑의 철학』에서)

내 쇼핑은 미학적이지 않다. 내가 사들인 물건들이 그다지 유용한 것도 필요한 것도 아닌 건 결과일 뿐이지, 당시는 유용하거나 필요하다는 확신으로 구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내 잡동사니 상자에 한 개 남아 있는 ‘뿌리는 에어컨’이 입은 옷에 스프레이하는 순간 시원해질 줄 알았지 플라스틱 분무기에 담은 물을 뿌린 것과 별다를 바 없이 축축해질 따름인 줄 알았다면 절대 사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상품 소개 글에 적힌 ‘급속 냉각’ 기능이라는 걸 확대해석해 햇볕에 달궈진 자동차 안에 뿌리면 순식간 온도를 낮춰 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차 가진 친구를 깜짝 기쁘게 할 셈으로 세 개나 샀다. 이상하게도 내 친구들은 내가 발굴한 물건들을 거저 줘도 달가워하지 않는데, 요건 환영받았다. 그게 지난해 가을 일이니 이 여름에 잘 쓰고 있는지 궁금하다.

내가 소비와의 유희를 하는 곳은 주로 지하철이나 벼룩시장이나 할인매장이다. 나는 할인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 할인 폭이 클수록 매료된다. 마음에 드는 구두가 정가 10만원인데, 정가가 20만원이라는 오직 그 이유로 마음에 들지 않는 구두(할인가는 동일!)를 택하고 후회한 적도 있다. 할인매장과 거리가 먼 존재가 소위 ‘얼리어답터’다. 소설가 이제하 선생님은 얼리어답터다. 새 물건이 나오자마자 비싼 값을 치르고 사들이신다. 진정한 미학적 소비 유희자인 얼리어답터와 필요도 없는 걸 싼 맛에 잔뜩 사들이는 ‘레이트 어답터’가 만나는 곳이 벼룩시장이다. 전자는 판매자로 후자는 구매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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