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장은 곧 개방된다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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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27일 오후6시 조선호텔 오키드룸.60여명의 한국화랑협회 회원이 모인 가운데 96년도 정기총회가 열렸다.
이미 오후2시부터 미술평론가를 초빙,「미술시장개방에 따른 유통구조 개혁을 위한 심포지엄」을 가진 다음이었다.
연례 결산보고에 이어 다음 의제는 올가을 화랑미술제에 외국화랑들의 참가 허용문제.
이 자리에서 「우리 스스로 외국화랑을 불러들여 외국시장에 대한 정보를 적극 챙기자」는 「허용파」는 금세 수세에 몰렸다.
국내화랑의 여건상 아직 빠르다는게 거부이유였다.외국작가전.해외미술품 수입에서 재미를 본 화랑들이 특히 거세게 반발했다.
결국 협회는 해외미술시장의 자료나 정보를 따로 수집하자는 쪽으로 타협하고 자료수집비 2천만원을 예산에 올리는데 그쳤다.
심포지엄에서 나온 대책.대안들이 화랑간의 엇갈린 이해 앞에 무력해진 현장이었다.
국내미술시장은 결론적으로 말하면 내년이 개방원년은 아니다.비록 우루과이라운드(UR)타결로 내년에 모든 시장이 개방돼야 하지만 미술품 소매업,즉 외국화랑 진출은 예외리스트에 올라있다.
외국화랑 진출이 단지 미술품거래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나라의 문화정책과도 관련이 깊어 이 분야를 외국인 투자제한조항에묶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한리스트는 점차 축소될 예정이어서 외국화랑의 진출은사실상 시간문제다.
개방대책 마련에 있어 국내미술시장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난제는 유통구조상의 문제.비공개거래,지나치게 높은 작품가 등은 70년대 중반 미술시장붐이래 관행이 되면서 누구도 손댈수 없을 만큼 굳어져 있는 상태다.
그래서 개방의 가장 큰 충격으로 개방이 몰고올 미술품 가격파괴가 손꼽힌다.
지난 몇년간 불황을 겪으며 국내미술품가격은 많게는 40%에서,적게는 20%까지 하향조정됐다.그런데도 외국화랑들이 좋은 작품을 적당한 가격에 대량 들여올 경우 그나마 가격체계조차 붕괴할 것으로 예상된다.
학고재 우찬규(禹燦奎)사장은 『가격문제는 심각하지만 터뜨리면빨리 상처가 아무는 종기와 같다』고 말한다.그러나 그 역시 『가격파괴의 피해가 얼마나 클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해 사실상 뾰족한 묘책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호당 20만원하는 국내 중견작가의 1백호크기 작품은 1천2백만~1천4백만원선.그런데 이와 견줄만한 외국작가의 1백호크기 가격은 3백만~4백만원선이다.여기에 외국화랑의 신뢰까지 덧붙여지면 국내화랑을 찾을 고객이 얼마나 되 겠느냐는게 화랑들의 고민이다.
아미화랑 김영석(金永石)대표는 가격파괴를 가격의 세계화라고 말한다. 『한국시장이 살아남으려면 미술품가격을 빨리 국제가격화하는 수밖에 없다』고 金씨는 말한다.
화랑협회가 이처럼 개방대책 마련에 소심한 것과 달리 판화협회는 3월말 열릴 제2회 서울판화미술제에 4개의 외국화랑 참가를허락했다.이번에 참가하는 외국화랑은 현장에서 판매도 할 예정이다. 판화협회가 화랑협회와 달리 전향적 결정을 내린 배경은 판화값이 싸기도 하지만 이미 외국화랑의 진출이 시작됐다고 봤기 때문이다.
지난해 몇몇 외국화랑은 국내화랑의 이름을 빌려 외국작가전을 치렀다.올해 판화미술제에도 몇몇 화랑이 이런 방식을 사용,참가할 것으로 보인다.
또 외국화상들의 국내시장조사도 근래들어 눈에 띄게 활발하다.
시카고 아트페어를 주최하는 토머스 블랙먼사장이나 마이애미 아트페어.홍콩 아트페어를 주최하는 리 안 레스터사장이 지난해부터몇차례 다녀가며 국내에서 국제아트쇼 개최를 타진 하는 중이다.
미국의 유수한 화랑인 페이스.가고시안이나 파리의 르롱.엔리코나바라화랑 등은 개방이후 한국을 가장 먼저 찾을 화랑으로 손꼽히고 있다.
소더비 서울지점 조명계(曺明桂)사장은 국내의 우려와 달리 『외국화랑이 쉽게 들어올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국내고객들이 신분노출의 위험이 있는 외국화랑을 이용할리 없다는게 그 이유다.
유통구조 개선을 거론할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경매제실시도 曺사장은 마찬가지 이유를 대며 상당기간 정착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본다.
그러나 한때 고미술시장의 대부노릇을 했던 김정웅(金正雄)씨는㈜한국경매를 차리고 이제는 경매를 해볼 때라고 나서고 있어 주목을 끈다.
매출신고만 정확히 하면 거래자신분은 특별히 노출시키지 않아도된다는게 金씨 입장이다.金씨는 오는 16일 고미술품 2백점을 경매에 부칠 예정이다.
그렇지만 그간 10여차례의 미술품경매가 일반에 외면당하고 단명했던 사실에 비춰보면 金씨의 경매가 성공적으로 뿌리 내릴지는미지수다.
개방에 대해 현실적 대안을 못찾는 화랑계의 모습은 마치 수년전부터 개방대책을 마련하자고 목소리만 높인채 정작 대책없이 올해부터 개방을 맞이한 건축계 모습과 전혀 다를바 없어 미술계 안팎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윤철규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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