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칼럼>전두환씨의 궤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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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인간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인가.전두환(全斗煥)전대통령과 너무 닮아 5공(共)시절 TV출연마저 금지당했던 탤런트 박용식씨가 지난해 TV 정치드라마에선 全씨역을 맡아 장안의 화제가 됐다.그는 어느날 TV대담에 나와 퇴임직후 全씨와 직접 만난 이야기를 전했다.연희동을 찾은 朴씨를 全씨는 반갑게 손잡고 참 많이 닮았다고 감탄하면서 『나 때문에 얼마나 고초가 많았느냐.
그러나 나는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위로했다고 한다. 대통령과 얼굴이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생업을 포기해야 했던게5공시절의 기막힌 세월이었다.무심코 던진 돌에 호숫가 개구리는삶의 뿌리가 뽑히는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지만 이른바 통치자는 그런 사실마저 모르고 지냈다.
80년 5월 하순의 아침도 밝고 싱그러웠다.출근길 대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나는 멈칫했다.한 신문사의 해직기자 대표였던 친구가 빙그레 웃으며 서 있지 않은가.아! 쫓기고 있구나,숨을곳이 없어 찾아 왔구나 하는 직감이 들었다.한달 가까이 함께 생활했다.몇명이 사살됐다,누가 잡혀갔다,어느 신문이 폐간되고 방송국이 통.폐합된다는 등 신문사에서 듣는 소문은 날로 흉흉해갔다.그때 1년은 누구에게나 불안과 초조로 이어진 끔찍한 한 해였다.그 친구는 그후 몇몇 친구 집을 더 전전하다가 그해 12월 불심검문에 잡혀 옥살이를 했다.친구가 잡힌 지 며칠후 나또한 두명의 수사관에게 양팔이 잡혀 그 악명 높은 남영동 대공분실의 어두운 취조실에서 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해직기자 대표였다는 이유만으로 1년여 세월을 도망자처럼 쫓겨야 했던 나의 친구 뿐이겠는가.어느날 갑자기 직장을 잃었던 수많은 언론인들,공직자들,방송을 천직으로 알고 아끼고 사랑했던,이젠 이름조차 잊혀져가는 동양방송(TBC)해체,이 모두가 80년 그 한해에 이뤄졌던 폭압 정치의 산물이었다.그 폭압 정치의지도자였던 전두환 전대통령은 26일 첫 공판에서 이렇게 말했다.『젊고,언제까지 대통령을 할지 모를 본인이 돈을 받지 않으니기업인들이 불안해 잠을 못자고,심 지어 외국망명 생각까지 하면서 투자하지 않았다.』 그래서 50대 재벌을 청와대로 불러 안심시킨 뒤 정치자금을 받기 시작했더니 경제가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진술했다.
자고 나면 국제상사같은 거대 기업이 공중분해되던 그 험악했던시절,어느 기업인인들 하루가 편했을 것인가.투자는 커녕 하루를예측키 어려운 살얼음판 아니었던가.그러나 당시의 통치자는 이를돈을 받지 않으니까 기업인들이 불안해하고 돈 을 받은 다음부터경제가 잘 돌아 가더라로 인식하고 있다.정치자금은 내가 필요해받은게 아니라 기업인들의 불안심리를 달래기 위해 마지못해 받아썼다는 이야기로 들린다.이건 궤변도 아니고 억지도 아니며 생떼도 아니다.적반하장(賊反荷杖) 이다.
나는 본란을 통해 김영삼(金泳三)정부의 과거청산방식이 순서가뒤바뀐 부관참시(剖棺斬屍)형 이벤트 사업이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그러나 이 비판은 죄의 처리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지,죄자체를 무시하자는게 아니었다.아무리 자신의 죄 를 미화하고 변호하며 정당성을 강조하는 곳이 법정이라지만,일국의 대통령을 지냈던 사람으로서 죽음에 이르는 단식까지 하며 자신의 결백성과 결연한 의지를 천명했던 그 당당한 통치자가 자신이 제공한 공포분위기는 나 몰라라하고 공포에 떨다 가 돈을 낸 사람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운다면 이야말로 적반하장 아닌가.
얼굴이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생업을 잃어야 했던 탤런트에서부터,어둡고 기나긴 세월을 가슴졸이며 살아야 했던 수많은 선한 사람들을 분노케 하지 말라.5공의 폭압정치를 재벌에서 서민까지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는데 유독 폭압 통치자 당 사자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잘못된 역사다.
물론 5공 시절의 고통을 5공 통치자의 중형을 통해 보상받고자 하는 보복심리로는 역사가 바로 서질 않는다.그때의 대통령이그때의 잘못을 시인하고 사죄하는 것이 어제의 고통을 잊게 하고내일의 희망을 안겨주는 진정한 보상이며 올바른 과거청산 작업이다. 대통령으로서 법정에 섰다면 이젠 더 이상 추락할 곳도 없다.무엇이 두렵고,무엇이 창피해 잘못을 숨길 것인가.대통령으로서 권력 남용이 얼마나 무서운 대가를 치르는 것인지를 밝히는 일이 후세 위정자에게 남길 전두환 전대통령의 마지막 기여다.다음 법정에선 외형상 당당함 못지않게 궤변아닌 진실로 잘못된 과거를 스스로 청산하는 참회를 보여주길 기대한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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