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올림픽은 ‘안 돼 올림픽’… 붉은 악마 티셔츠 못 입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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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베이징에 들어가려면 3중 검문검색을 거쳐야 한다. 16일 베이징 외곽 징화 고속도로에 설치된 검문소에서 중국 공안이 수색견을 데리고 차량을 검색하고 있다. [베이징 AFP=연합뉴스]


“비슷한 디자인이나 같은 색깔 옷 입으면 안 돼.”

“꽹과리나 북·나팔 등 악기는 안 돼.”

“응원구호를 적었더라도 플래카드나 피켓은 무조건 안 돼.”

“비참가국 국기는 절대 안 돼.”

“참가국 국기라도 가로 1m나 세로 2m 이상은 안 돼.”

“우산을 펴들고 오래 서 있어도 안 돼.”

“화물차는 베이징으로 들어오면 안 돼.”
베이징 올림픽은 ‘안 돼 올림픽’이다. 개막이 20여 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날이 갈수록 ‘하지 말라’는 강도가 세진다. 이미 베이징에는 이중, 삼중의 삼엄한 검문검색이 이뤄지고 있다. 테러 대비다. 시민들이나 외국인의 불편은 안중에도 없다. 이런 가운데 베이징올림픽조직위(BOCOG)는 지난 14일 ‘경기 관람 규칙’을 발표했다. 모조리 ‘안 된다’뿐이다.

#1. 베이징에서 자영업을 하는 축구광 김범주(38)씨는 요즘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베이징 올림픽이 개막되면 한국 축구대표팀의 경기를 중국에서 태어난 아들(6)과 함께 보면서 한국팀 응원단인 ‘붉은 악마’가 이끄는 응원전에 흠뻑 빠지고 싶었던 기대가 물거품이 됐기 때문이다. 김씨는 “다음달 7일 친황다오에서 열리는 올림픽 축구 국가대표팀의 카메룬전 경기를 단체 예약했는데 제대로 응원을 못하게 돼 맥이 풀린다”고 말했다. 관람 규칙에 따르면 일가족이 같은 옷을 입는 것도 특정 집단을 선전하는 행위로 보고 입장하지 못하게 한단다. 조직위는 한국의 붉은 악마와 중국 응원단 사이에 충돌할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2. 지난 10일 오후 베이징 중관춘(中關村) 하이덴(海淀)남로19호 베이징 인력시장 하이덴지국 건물 로비. 이곳은 취업 시즌만 되면 건물 밖까지 길게 줄을 선 구직자들의 행렬이 신문 지면에 단골로 등장하던 베이징의 대표적인 인력시장이다. 하지만 구직자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5월 22일부터 10월 8일까지 인력시장을 임시 폐장했기 때문이다. ‘무조건 모이지 말라’는 베이징 올림픽 안전관리 지침을 솔선수범한 것이다.

#3. 베이징에는 15일부터 3중의 방어선이 설치돼 24시간 검문검색 체제에 들어갔다. 테러 용의자나 폭발성 물질이 베이징 시내로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는 게 공안의 설명이다. 1단계는 베이징을 연결하는 고속도로와 국도·지방도로 검문소에서, 2단계는 베이징 교외 순환도로, 3단계는 시내 주요 간선도로와 제2, 제4 순환도로에서 실시한다. 검문소마다 수색견과 폭발물 탐지기를 설치했고, 탑승자들은 불심검문에 따라야 한다. 실시 첫날인 이날 오전 베이징과 주변 고속도로의 톨게이트는 트럭과 승용차가 수㎞ 이상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도로를 메우는 진풍경이 빚어졌다.

이달 들어선 외지 화물차량의 베이징 시내 진입을 불허했고, 베이징 등록 화물차라도 시내 운행이 여의치 않다. 일손을 놓은 이사업체 관계자들은 침통한 표정을 감추지 않는다.

#4. 베이징 시정부는 7월부터 베이징 전역의 지하실방을 임시 폐쇄했다. 방값이 싼 지하실방은 거주가 불분명한 외지인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치안 사각지대로 꼽힌다. 시정부는 4월부터 올림픽촌 인근 지하 세입자들을 강제 철수시키기 시작했으며 5월 말엔 건물주들에게 관련 지침 사항이 담긴 공문을 보내 신규 지하실 임대를 금지시켰다.

#5. 조직위는 지난달 2일 ‘올림픽 기간 중 외국인의 행동 가이드라인’ 57개 항을 발표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중국 비난 인쇄물을 갖고 있거나 시위할 의도가 있는 외국인, 테러나 폭력 행위의 개연성이 있는 이들은 베이징에 들어올 수 없다. 또 외국인은 입국 즉시 중국 경찰에 신고해야 하며 여권 등 관련 서류를 갖고 있어야 한다. 중국 경찰은 외국인의 여권 등을 검사할 권리가 있다. 경기장에선 중국을 모욕하는 내용의 현수막을 소지할 수 없으며 베이징 어디에서도 국기와 국가 상징물을 모독하는 행위는 형사 처벌 대상으로 못 박았다. 비자 발급 조건도 까다로워져 4월부터 복수비자 발급이 중단됐고, 최근엔 비자 신청 때 중국 내 주소, 호텔 및 항공권 예매 확인서 등을 제출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지금 같은 추세라면 앞으로 어떤 ‘금지’ 조치가 더 나올지 모른다. 올림픽조직위 관계자는 “정부의 올해 최대 국정 목표 중 하나가 안전하게 올림픽을 치르는 것”이라며 “테러 가능성이 가장 큰 올림픽으로 꼽히는 만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근본 처방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연세대 한석희(국제정치) 교수는 “중국은 현재 세계인의 축제로서 올림픽을 준비하기엔 대내외적으로 여유가 없는 상태”라며 “안전하게 치르는 게 성공한 올림픽이란 자의식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베이징의 외신기자들은 “티베트 사태와 지진 등으로 베이징 올림픽의 성공 여부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안전을 위협하는 문제가 생기면 회복 불가능한 타격이 될 것”이라며 “이 때문에 노이로제에 가까울 정도로 안전 문제에 올인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베이징=정용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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