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철환의즐거운 천자문] 특유의 입담으로 채널 누비는 김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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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작은 개가 사납게 짖듯이 저도 사납게 말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중략) 저의 말로 인해 상처받았을 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한국정치사에 최장수 대변인(4년10개월)으로 기록된 민주당 유종필씨의 고별사 일부다. 그의 어록 중에는 재미난 것이 많다. “흑색선전은 비아그라 같다. 절망적 상황에서 한 번 일어서기 위해 시도하는 것이지만 자칫 스스로 죽는 수가 있다”

방송가에서 거칠고 사납게 말하기로는 김구라를 따라갈 이가 없다. 1993년 SBS 개그맨 공채 2기로 데뷔한 그가 언제부터 이런 비속(?)한 예명을 썼는지는 불분명하다. 인터넷이나 케이블은 몰라도 지상파 방송사로는 위험한 캐스팅일 수도 있었던 그가 지금은 종횡무진 채널을 누비고 있다. 평일, 주말 없이 ‘구라’가 쏟아져 나온다. 김구라 없는 예능프로와 김구라 있는 예능프로로 나뉠 정도다.

김구라의 전략을 보면 이런 우화가 그려진다. 신이 인간을 만들 때 처음엔 모두를 천사(angel)로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천사들은 좋은 말만 한다. 언제나 착하고 겸손하다. 그러다 보니 세상이 도무지 재미가 없어졌다. 그래서 신은 인간의 일부를 동물(animal)로 만들었다. 치고받기도 하고 물어뜯기도 하니 세상은 아연 활기차졌다.

동물 같던 김구라가 대중에게 호감도로 돌아선 데는 천사 같은 아들 동현이의 공도 컸다. “저런 아버지에게 저런 아들이 있다니….” 이거야말로 미래의 얼굴은 희망이라는 증거다. 자연스럽게 “구라 역시 한때는 천사 아니었을까. 그가 그렇게 ‘악독‘해진 건 순전히 배가 고팠기 때문일 거야”라는 데까지 생각이 모였다.

‘명랑히어로’에서 개그맨 김국진을 이별의 아이콘, 아나운서 김성주를 배신의 아이콘으로 규정한 김구라는 오랜 기간 저주의 아이콘으로 행세해 왔다. 하지만 재야생활을 청산하고 ‘권력’의 품에 안착한 뒤 독설은 많이 순해졌고 막말은 많이 정돈됐다. 여기서 구라의 딜레마가 시작된다. 야인시절의 독기를 뿜어내기엔 그가 앉은 방석이 너무 푸근해진 것일까. 속 시원한 ‘악플’을 쏘아주기를 기대하는 시청자라면 구라의 변신이 야속할 수도 있다.

요즘 그는 출연하는 프로마다 자신이 쏜 언어의 화살에 맞아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고개 숙여 화해를 신청하는 중이다. ‘상상플러스2’에 출연해서는 이효리에게 “아들 동현이를 포함해 2대에 걸쳐 사과한다”는 말까지 했다. 사실 눈 감고 들으면 구라의 말은 독설보다 직설에 가깝다. 너를 낮추어서 내가 올라간다는 게 아니라 약점을 숨기고 사는 사람들의 가면을 벗겨 더불어 편안해지자는 게 최근의 ‘구라식’ 화법이다.

천사는 대화를, 동물은 대결을 즐긴다. 차이는 소통하느냐의 여부에 달렸다. 세 치 혀로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 대화가 부족해 세상이 소란한 요즘 김구라의 부드러운 변신을 통해 얻은 교훈이다. 지금까지 62회 연재된 이 칼럼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 드린다. 평생 방송과 함께해 온 필자가 꿈꿔 온 것도 그런 소통과 대화다.  

주철환 OBS 경인TV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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