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논조>미국,한반도서 일관된 외교정책 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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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국의 역사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는 이른 봄이었다.한국이 성공한 자본주의 국가로 변신했지만 노인들은 아직도 보릿고개의 배고픔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보릿고개가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렸다.하지만공산독재국가인 북한에서의 보릿고개는 엄연한 현실이며 북한정권을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는 요소다.
만약 북한의 식량사정이 최근 본지(本紙)의 크레이그 스미스 기자가 중국국경에서 인지한 것처럼 매우 긴박한 게 사실이라면 북한군 장성들은 도대체 왜 지난 몇개월 동안 한결같이 요청했던식량원조 호소를 취소한 것일까.
아마도 북한은 지난 몇개월동안 국제사회에 줄기차게 요구했던 식량원조 호소의 진정한 목적인 한국과 한국의 두 동맹국인 미국.일본의 관계를 이간시키는 것을 달성한 것처럼 보인다.
북한이 의도했던 이와같은 이간책이 성공했다는 시사는 최근 북한이 내놓은 지금까지의 관행과 전혀 다른 두개의 성명이 발표된시점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미국이 한국의 반대를 무시하고 북한에 인도적 원조의 제공을 강행하겠다고 북한에 통보한 지 6일만에 북한은 공개적으로 미국의 지원에 감사했다.
한국에 3만7천명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는 미국을 세계 최후의 전쟁도발자로 비난해온 북한이 미국에 표시한 전례없는 감사표시는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에 대한 분명한 조롱이었다.
북한은 또 구체적으로 일본의 보다 더 독자적인 대북(對北)외교정책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했다.그런데 이렇게 감사함을 표시한바로 다음날 북한은 그동안 국제사회에 해왔던 식량및 기타 비상원조 요청을 취소했다.
이례적으로 박길연(朴吉淵)유엔주재 북한 대사는 이러한 원조중단 요청이 북한의 군부에 의해 취해졌다고 밝혀 북한군 장성들의영향력을 시인했다.朴대사를 인용한 또다른 보도들은 북한이 하루전에 감사를 표시했던 국가들에 대해 朴대사가 이 들 국가들이 식량원조를 북한에 대한 정치적 지렛대로 삼으려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고 전했다.
朴대사가 북한 군부의 영향력 행사를 시인한 것은 김일성(金日成)후계자인 그의 아들 김정일(金正日)이 권력을 장악하는데 여전히 문제가 있음을 시사한 가장 최근의 유일한 시사다.
김일성이 사망한 지 1년6개월이 지났음에도 김정일은 아직 주석직이나 노동당총비서에 정식으로 취임하지 못하고 있다.
매우 드물게 공개석상에 출현하는 김정일은 항상 군인들에 의해둘러싸인 모습의 사진을 보여줄 뿐이며 현재로선 군부나 김정일 그 어느 쪽도 상대를 축출할 만한 자신감이 없는 것같다.
미국의 2백만달러 대북 식량지원 제의가 본능적인 동기에 의해마련됐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비록 그들이 악마의 정부아래 있을지라도 그들을 돕는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에서 일관된 외교정책을 수행할 필요가 있다.이는 미행정부가 한반도의 모든 문제에 관해선 동맹국인 한국 정부의 통찰과 충고에 공개적으로 유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무장된 휴전선 비무장지대를 따라 보릿고개가 점점 다가오면서 앞으로 직면하게될 어려운 시기에 미 행정부가 절대로 잊어서는 안될 점은 바로 이것이다.
[정리=이장규 뉴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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