對北정책 선거때마다 强穩 교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우리정부의 대북(對北)정책은 선거철만 되면 때로는 강(强),때로는 온(穩)의 한편으로 치우쳐 왔다.
6공 정부가 91년말「연내타결」을 외치며 서둘러 추진했던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 공동선언은 14대 총선을 불과 한달여 앞두고 발효됐었다.그러던 92년 대북정책이 강경기류로 돌아선 것은 대선(大選)을 6개월여 남긴 시점이었다.
김영삼(金泳三)정부는 94년 북.미 핵협상이 타결되자 기다렸다는 듯 대북정책 기조를 온건기류로 바꿨다.지방선거 7개월 전이었다.특히 투표일 이틀전(6.25)에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쌀수송선「씨 아펙스」호를 띄워 보내기도 했다.출항 식이 전국에중계되던 날 밤 여당후보들은「서울~평양 축구제전」「경기 북부지역의 통일전초 기지화」등 통일관련 공약을 마구 쏟아냈다.
15대 총선을 50여일 남겨 둔 지금 정부의 대북정책은 92대선 때처럼 다시 강경기조로 돌아서고 있다.총선이전에는 대북지원이란 말도 꺼낼 분위기가 못된다.
다른 정황도 비슷하다.92년 대선때는 안기부가 오랫동안 추적해 개가를 올린 김낙중간첩사건이 발표됐었다.당시 민자당 김영삼후보는 대북 강경발언 빈도를 늘려갔고 유세장에 나가서는 『통일을 위해 색깔이 분명한 사람이 대통령이 돼야한다』고 목청을 돋웠다.투표일 1주일을 앞두고는 시베리아 벌목공 강봉학씨 귀순사실 도 발표됐다.
지방선거가 여당의 참패로 끝난지 4개월여 뒤인 지난해 10월말 안기부가 추적하던 무장간첩이 군.경에 의해 사살.체포되자 정부는 강도높은 대북비난의 포문을 열었다.때마침 북한외교관 망명사건이 겹쳤다.
성혜림(成蕙琳)일행 망명사건은 비록 파장은 다르지만 92년 북한유학생 金명세씨 망명사건을 연상케 한다.러시아에 유학중이던金씨가 한인 목사집에 피신,망명을 요청하면서 북한요원들과 대치상태에 있다는 사실이 처음 보도된 것이 5월.「 무조건 돌려달라」는 북측 요구에도 불구하고 한.러간 끈질긴 협상끝에 金씨는그해 10월 김포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대선 2개월전이었다.
정부 고위관리는 成씨 일가 사건과 관련,『언론의 보도로 신변위협만 초래됐다』면서『「작업」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러 한달 정도면 성사됐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이 말이 사실이라면 유권자들은 3월말께 기자회견장에 나온 成씨 일 행의 모습을볼 수 있었을 것이고 열흘 뒤쯤 투표장에 나갔을 터다.
미국무장관을 지낸 헨리 키신저박사는 『새로 출범한 정부일수록국민적 단합을 유도해 국내정치 문제를 해결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특히 국민감정을 자극할 수 있는 사안이 주로 등장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통일문제는 사안의 성격상 국민감정에 호소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선거때마다 단골메뉴로 등장해 왔다.
그러나 통일문제로 표를 모으기란 결코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우리사회는 아직 통일의 방법이나 절차,대북관계 설정에 대해 국민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김일성(金日成) 조문사건에서 보듯 「강경」과 「화해」라는 두 가지 상반된 인식이 국민들사이에 혼재돼 있다는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양쪽을 모두 만족시킬 정책은 찾기 힘들고,그래서 선거때마다 양쪽을 저울질하다 보니 대북정책이 강온 양극을 오갈 수밖에 없었다. 통일은 바로 우리시대의 것 만이 아니며 따라서 대북정책도 지금 당장의 이해관계보다 장기적 구상에 따라 국민적 합의를이끄는 방향으로 입안,추진돼야 한다는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김용호 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