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 ‘불법이민과의 전쟁’ 한목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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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지난주 파리 샹젤리제 인근의 유흥주점. 20대 남녀 직원의 말투가 프랑스 사람 같지 않았다. 물어보니 모두 동유럽 출신이었다. 일부는 루마니아 등 유럽연합(EU) 회원국 출신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꽤 됐다. 현재 프랑스 이민법상 EU 회원국을 제외하면 모두 체류허가증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체류증 없이 일을 하고 있었다. 현재 EU 27개국에 거주하는 불법 이민자는 600만∼8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스페인에 80만여 명을 비롯해 영국·독일·이탈리아·프랑스 등 잘사는 서유럽 5개국에 절반 이상 몰려 있다. EU 회원국이 7일 불법 이민을 강력하게 단속하는 ‘이민협정’에 만장일치로 합의한 것도 이런 배경에 따른 것이다.

프랑스 일간 르몽드에 따르면 이민 협정은 ‘합법 이민은 까다롭게, 불법 이민은 추방 등 강제조치’로 요약된다. 이에 따라 오랫동안 불법 체류한 이민자들 가운데 심사를 거쳐 일괄적으로 합법화하는 조치를 폐지하기로 했다. 또 노동허가증을 갖추지 않은 이민자를 고용한 업자들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합법 이민 조건도 강화해서 생계가 가능한 수입이 있고 해당국의 언어 소통이 가능한 사람에 한하기로 했다. 불법 이민자를 적발하면 추방을 의무화하는 조항도 신설키로 했다.

불법 이민과의 전쟁의 가장 큰 이유는 우선 돈 문제다. 서유럽 5개국은 경제적인 이유로 불법 이민을 어느 정도 눈감아 온 게 사실이다. 값싼 노동력은 서유럽 경제를 돌리는 원동력이 돼왔던 것이다. 그러나 서유럽의 불경기가 지속되면서 사정이 달라지는 것이다. 최근 유럽의 경제연구소들은 2010년까지 불황이 이어지면서 실업률이 높아질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자국민도 일자리가 없는데 불법 이민자를 챙길 여유가 없다는 게 각국 정부의 입장인 것이다.

불법 이민자가 급증하는 가운데 불경기가 이어지자 범죄가 증가하는 것도 이민정책 선회의 한 이유다. 지난달 파리 경찰은 파리 시내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불법 마사지 업소를 일제히 단속하기도 했다. 중국인 운영 마사지숍은 불법 노동은 물론 퇴폐영업까지 하고 있어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경제지 레제코는 유럽에서 이민자 수가 가장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스페인의 경우 전체 구금자의 세 명 중 한 명이 이민자라고 보도했다.

이런 이민법 강화 움직임을 두고 유럽 민족주의의 부활이라는 시각도 있다. 프랑스 극우파 정치인들은 이미 10여 년 전부터 “출산 장려 정책으로 덕을 본 건 아이로 돈벌이하는 아프리카 이민자들뿐”이라고 불평해왔다. “머지않아 프랑스 땅에는 아프리카 사람이 더 많이 살게 될 것”이라는 그들의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이 크게 늘어난 게 이민법을 강화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힘이 됐다는 것이다.

이런 우려에 대해 볼프강 샤우블레 독일 내무장관은 “EU 사람들만을 위한 블록을 쌓자는 것이 아니다. 더 큰 사회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막아보자는 취지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유럽 불법 이민자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아프리카 국가들 사이에서는 유럽의 이민 블록에 공동 대응하자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파리=전진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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