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균 전 자유기업원 원장의 '행복한' 변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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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5월 당시 자유기업원 원장이었던 민병균(64)씨는 격렬한 '좌.우익 논쟁'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나라가 좌경화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며 "좌익이 더 이상 국정을 농단하지 못하도록 우익은 잠에서 깨어나라"고 외쳐댔다.

좌익으로 지목받은 DJ 정부와 시민단체들은 강하게 반발해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명예훼손으로 제소되기도 했지만 그는 주장을 꺾지 않았다.

그런 '민 원장'이 4년이 지난 지금 자동차를 정비하는 '민 기사'로 변신했다. 지난해 10월부터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있는 '코리언 모터스'라는 정비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이에 앞서 자동차 정비 기능사(2급) 자격증도 땄다. 그러나 말이 '기사'이지 하는 일은 '시다(보조)'다. 업무 시간에 인터뷰를 할 수 없다고 해 쉬는 날인 토요일(23일) 오전 그가 일하는 정비센터에서 만났다. 하는 일도 그렇거니와 머리칼도 젊은 사람처럼 빳빳하게 세웠다. 도무지 이순을 넘겼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다.

"전보다 더 젊어 보입니다"는 인사에 "하고 싶은 일을 하니 그런 모양"이라고 쑥스러워 했다. 정비센터에서 그는 말단이다. 팀장을 포함, 5명이 같이 일하지만 팀장의 얼굴을 볼 일은 거의 없다. 바로 위 고참이 차를 정비하면서 공구를 달라고 지시(?)하면 건네주고, 청소하라면 청소를 하는 정도다. 그나마 처음 취직했을 땐 정비 쪽엔 쳐다보지도 못하고 세차만 했다. 차 속 바닥에 붙은 껌 등을 떼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젊은 여성이 열쇠를 던져 주면서 "안팎으로 깨끗이 해놓아"라며 반말 비슷하게 할 땐 정말 힘들었다. 왕년엔 '기사 딸린 차'를 타고 다녔던 그가 아니던가.

하지만 세상공부이려니 하고 참아냈고,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정비 일을 할 수 있게끔 승진(?)했다. 그렇더라도 고참이 엔진오일통을 열면 흘러나온 폐유를 치우고, 새 통을 전달해 주는 일 정도가 고작이었다. 무슨 일을 하랴고 물어도 고참들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팔을 붙잡고 매달려야 겨우 한 수 배울 수 있었다. 다음달에는 자동차 외관을 맡는 판금과 도장 부서로 옮긴다.

"친구나 친지들이 왜 이 일을 하느냐며 물어요. '재미있어서'라고 말하면 안 믿어요. 주식 하다 망했느냐, 이민 가려느냐, 자동차 정비소를 차릴 계획이냐는 등 말이 많아요. 하긴 집사람에게도 처음엔 이 일 한다고 얘기를 못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민 기사는 "정말 재미있다"고 몇번을 강조한다. 인터뷰를 하는 중에도 자동차 얘기면 그저 신을 냈다. 'RPM(revolutions per minute)3000'이 뭔지 아느냐고 해 모른다고 하자 이내 "크랭크 축이 1분에 3000번 회전하는 것"이라며 "이렇게 회전시키려면 피스톤이 1초에 100번 오르내려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똑-딱'하고 말하는 사이에 피스톤이 100번 왔다 간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하냐"고 스스로 감탄했다. 요즘 과거의 '동지'였던 보수 우익 인사들과는 전혀 만나지 않는다. 가끔 언론을 통해 소식을 듣고, 이들이 보내 준 발간물을 보기도 하지만 아무런 느낌도 없다고 한다.

"전에는 그런 얘기를 들으면 가슴이 뛰었어요. 좌익들이 나라를 망친다는 안타까움에 몸을 떨었죠. 그러나 이젠 정말 관심이 없어요. '남의 일'같아요."

하지만 그의 과거 행적을 보면 요즘 그의 모습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외국어대 교수.장은경제연구소장.자유기업원장 등을 지내면서 숱한 논쟁의 한가운데 서 있던 그였다. 외대 교수 시절인 1980년대 후반 한국은행의 독립 문제를 놓고 한은 편을 들면서 "고시 출신 관료들이 나라를 망친다"고 비판해 한동안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한국경제연구원에 있던 90년대 초반에는 금융실명제를 추진하던 YS 정권에 "모르면 공부를 더 하라"고 했다가 설화를 당하기도 했다.

"생각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가끔 당시에 쓴 글을 보면서 '참 잘 썼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지금 정부도 좌파 성격이 강한 것 같아요. 그러나 그뿐입니다."

그는 "이상하게 나라 걱정이 안 든다"고 했다. 어차피 겪어야 할 진통이라는 생각과 겪고 나면 더 좋은 나라가 될 것이라는 낙관론 때문이다. 그는 "우파를 이긴 좌파도 제도권에 들어오면 보수주의자가 되는 게 사회 이치"라고 말한다.

그는 "이제야 비로소 내 인생을 사는 것 같다"고 했다. 학창시절이 제1 인생이고, 사회생활이 제2의 인생이라면 지금은 제3의 인생이라며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사는 심플 라이프(simple life)가 정말 좋다"고 한다.

종일 차 밑바닥을 쳐다보는 일이라 마치고 나면 고개와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아프지만 툴툴 털고 집에 갈 때쯤이면 '땀 흘린 노동의 기쁨'이 전신을 휩싼다고 한다. "이렇게 일해서 받는 월급 100만원의 기쁨도 대단하다"며 웃는다. 세 시간가량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온 오후 1시30분쯤, 바깥 날씨는 4월의 봄답게 너무나 화창했다. 따라 나온 그는 "인생도 결국 이런 수채화 같은 것인데 이제야 그걸 깨달았다"며 알 듯 모를 듯한 화두를 던졌다.

글=김영욱 전문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 민병균씨가 걸어온 길=1941년생, 경기고, 서울대 상대 졸, 미 하와이대 경제학 박사, 한국은행 과장, 한국외국어대 교수, 세종연구소 선임연구위원, 한국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 고려종합경제연구소 소장, 장은경제연구소 소장, 자유기업원 원장(2000~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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