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북카페] 불행할 것만 같은 나의 삶이 슬프거나 우울하지 않은 것은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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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우연한 축복 
오가와 요코 지음, 권남희 옮김
문학수첩, 208쪽, 9000원

나는 소설가다. 『백스트로크』란 데뷔작을 냈고, 해변의 호텔 아가씨와 러시아어 번역가가 사랑을 하는 이야기로 작은 문학상을 처음 받았다. 삼 년 전 남쪽의 섬에서는 아내가 있는 지휘자를 만났다. 그의 아이를 가졌지만 애인은 끝내 아내 곁으로 돌아갔다.

“어떤 사람은 조심스럽게 말없이 떠나고, 또 어떤 사람은 경멸의 눈빛을 감추지 않은 채 마지막 대사를 내뱉은 후 두 번 다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비행기의 구토 봉투를 모으던 고모는 스칸디나비아 항공의 봉투를 든 채로, 어린 시절의 글쓰기를 유일하게 존중해 준 가정부 기리코는 안녕이란 말도 없이 사라졌다. 동생은 검푸르게 부어오른 얼굴로 두 눈이 찌부러진 채 죽어버렸다. 지금 나는 아들과 40㎏에 가까운 래브라도 레트리버 ‘아폴로’와 살고 있다. 메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공동(空洞)’을 안은 채. 

일곱 개의 단편-『실종자들의 왕국』『도작(盜作)』『기리코의 실수』『에델바이스』『누선수정결석증』『시계공장』『소생』-을 조각 맞추면 ‘나’의 윤곽이 드러난다. 오가와 요코의 신간 『우연한 축복』은 시간의 순서를 뒤섞은 한 편의 장편같은 연작 소설집이다.

“마지막 한 모금 남은 물통의 물을 실수로 모래에 쏟은 듯한” 절박한 한계 상황은 ‘나’에게 시시때때로 찾아들었다. 사람은 떠나고 물건은 사라졌다. 모두가 먼 세계로 떠나 아무도 ‘나’를 돌아보지 않을 때 조우하는 사소한 것들. 스쳐 지나간 “여러 사람들이 흘리는 추억담의 조각”들은 소설가인 내가 다시 원고지를 꺼내고, 만년필 뚜껑을 열게 했다. 나락으로 추락해버릴 것 같지 않았다면 놓쳤을 작은 것들이 극한의 순간, 따뜻한 위안이 돼 주었다. 불행할 것만 같은 ‘나’의 삶이, 그리고 이 소설이 슬프거나 우울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 ‘우연한 축복’ 때문이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전작『박사가 사랑한 수식』에서 딱딱하고 건조한 숫자와 공식에 따스한 숨을 불어넣어, 가장 아름다운 수학 이야기를 문학으로 녹여냈던 작가의 솜씨는 신간에서도 빛난다. 호수처럼 잔잔한 이야기는 극적이지도 않고 어떤 결말도 짓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몽롱한 분위기와, 새로 깔아 살이 쓰라리도록 뻣뻣한 침대보가 서걱거리는 소리가 옆에서 들릴 듯 영상미 넘치는 그의 문장은 반짝거린다. 

홍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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