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난민 식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미국 통계국은 세계 인구 67억 명의 1%인 6700만 명이 정든 고향을 떠나 불안과 초조 속에 살아가는 난민이라고 분류한다. 난민은 분쟁 같은 정치적 원인도 있지만 지진·사이클론 같은 자연재해 때문에도 발생한다.

기후변화로 인해 동식물 역시 고향을 떠난다. 북극해를 덮었던 얼음 장벽이 녹으면서 태평양 쪽에 살던 새들이 요즘 대서양에서 관찰되기도 한다. 계절 변화에 따라 먼 거리를 이동하는 철새는 기후변화에 특히 민감하다. 탈진한 상태로 번식지에 도착했는데, 막상 먹잇감을 구하지 못한다면 큰 문제다. 이동 시기를 조절하거나 번식지를 옮겨야 할 때도 있다.

유럽에서는 지난 20년간 산새가 20% 가까이 줄었다고 한다. 더욱이 영국에서는 산새가 4분의 3이나 줄었다. 기온이 올라가면서 적당한 서식지가 줄어든 탓이다. 영국에서는 또 박새의 산란기가 47년 전에 비해 2주나 빨라졌다. 박새 새끼는 알에서 깨어난 직후 겨울물결자나방 유충을 엄청나게 먹어치운다. 부화 시기와 벌레 유충이 나오는 시기가 맞지 않으면 번식에 실패한다.

식물도 예외는 아니다. 미국에서는 식목지대를 구분하는 경계선 일부가 과거에 비해 북쪽으로 300㎞ 이상 이동했다. 따뜻한 곳에 살던 종류가 더 북쪽에서도 살아가게 됐음을 의미한다. 북극권 툰드라 지역으로 가문비나무 숲이 빠르게 퍼지는 것도 지구온난화 때문이다.

유럽 포도주업체들은 기온 상승으로 전통적인 재배지에서 포도농사가 어려워지자 서늘한 곳을 찾아 산으로 올라가고 있다. 프랑스 전문가들이 서유럽 산악지대에서 171개 식물종의 생장고도를 비교한 결과, 지구온난화로 10년에 평균 29m씩 높은 곳으로 이동한 것을 확인했다.

미국 텍사스공대 연구팀은 기온 상승으로 캘리포니아 토종식물 5500종의 3분의 2가 100년 안에 현재의 서식면적의 80%를 잃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에 따라 캘리포니아 토종 식물 가운데 상당수가 100년 후에는 더 나은 서식지를 찾아 이동하는 ‘난민 식물’로 전락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난해 유엔 정부간기후변화위원회(IPCC)의 보고서에서도 100년 내에 지구의 기온이 1.5~2.5도 상승한다면 지구 동식물의 20~30%가 사라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반도에서도 향후 100년간 기온이 2도 상승한다면 기후대는 현재보다 북쪽으로 150~550㎞ 이동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식물들은 이런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제때 따라가지 못한다면 사라질 수밖에 없다.

전남 고흥·나주, 경남 밀양에서 한라봉이, 강원도 평창에서 사과가 재배돼 당장은 농민들이 좋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구온난화를 방치한다면 훗날 큰 재앙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강찬수 환경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