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철환의 즐거운 천자문] ‘퍼포먼스’의 달인 서태지 컴백 전략 = 기다림 → 호기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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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유세 도중 무장혁명군(FARC)에 납치돼 6년간 인질로 잡혀 있던 콜롬비아의 전 여성 대통령 후보 베탕쿠르가 용감한 정부군에 의해 불과 22분 만에 극적으로 구출됐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이것은 기적이다. 이처럼 완벽한 작전은 역사에서 전례가 없다”며 눈물을 보였다.

비슷한 시기, 한국의 수도 한복판에서도 영화 같은 장면이 연출됐다. 길이 12m의 미확인 비행물체(UFO)가 코엑스 상공에 나타나 출근길 시민을 놀라게 한 것이다. 불시착의 충격으로 몸체 중앙에서 떨어져 나온 기계장치에서는 얼마 전 충남 보령에서 발견된 미스터리 서클과 똑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어 신비로움을 가중시켰다.

둘 다 치밀하게 계산된 프로젝트였다. 전자가 생명을 구하는 정치적 이벤트였다면, 후자는 생활을 벗하는 예술적 퍼포먼스였다. 만약 이 계획들이 시나리오에서 한 치라도 어긋났다면 어땠을까. 모르긴 해도 베탕구르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을 테고 UFO 해프닝의 연출자인 서태지는 혹세무민으로 경범죄의 구설에 휩싸였을지도 모른다.

손자병법 36계 중 제4계는 이일대로(以逸待勞)다. 때가 올 때까지 참고 기다리다가 적이 피로에 지치면 그때 공격한다는 뜻이다. 1992년 데뷔 이후 하나의 공식처럼 된 서태지의 은퇴, 컴백 수순은 이제 일종의 관행처럼 자리 잡았다. 유효할 때 집중적으로 즐기고 적당할 때 전략적으로 사라진다. 매복하고 마냥 쉬는 게 아니다. 팬들이 외로움에 지칠 때까지 충전하고 준비한 후 그들과 기쁘게 나눌 수 있는 새로운 게임을 개발하여 홀연히 나타난다.

서태지가 주도하는 신비감의 정체는 대충 3단계를 거친다. 이미지, 메시지, 그리고 사운드. 미스터리 서클과 비행물체로 궁금증을 유발하더니 그의 홈페이지(서태지닷컴)에 실린 메시지는 호기심을 증폭시킨다. “태어나기 이전의 소리를 기억하는가? (중략) 나와 같은 프리퀀시의 너, 그리고 우리의 여덟 번째 소리가 잉태 될 것이다.”

서태지는 뮤지션(musician)이면서 매지션(magician)이다. 마술사가 사람을 현혹시켰다고 체포되는 일은 없다. 마술은 관객의 혼을 뺏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주파수(frequency)의 힘으로 관객의 혼을 탱탱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대중예술계에서 재능과 열정만으로 성공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운이 따라야 하고 관리가 충실해야 한다. 그의 안목과 리더십으로 차출되고 훈련된 이번 ‘작전’의 스태프들은 그가 4년6개월 동안 기획, 연출하는 카드섹션의 지정된 구역에서 결코 이탈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초지일관 지켜내야 했을 것이다.

펼치지 않는 책은 꽃받침대가 되고 읽히지 않는 신문은 신문지가 된다. 영리한 서태지는 작품을 만들 뿐 아니라 스스로 작품이 될 줄도 안다. 그는 프로덕션의 천재이자 프로모션의 고수다. 코미디 프로에서 달인이 되려면 16년이 걸린다는데 마침 서태지도 이 분야에서 일한 지 올해로 딱 16년이 지났다. 대중예술의 달인이 펼칠 여덟 번째 카드(사운드)가 사뭇 기다려진다. 

주철환 OBS 경인TV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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