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레터] 삶을 재충전 시키는 ‘안식여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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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목록에서 여행서가 다수 눈에 띄는 것을 보니 여름 휴가철이 코앞에 왔다는 게 실감납니다. 올해는 깊이 있는 사색을 담은 여행서가 유독 많습니다. 소설가 김인숙의 베이징 이야기 『제국의 뒷길을 걷다』, 소설가 유재현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기행문 『샬롬과 쌀람』(창비), 클래식 애호가 박종호의 이탈리아 여행기 『황홀한 여행』(웅진지식하우스) 등이 그렇지요.

그 중 『안식월』(황소자리)은 ‘딱 한 달만 일상에서 벗어나 혼자 쉬고 싶다’는 바람을 용감하게 실천한 40대 주부 작가 김수영의 여행에세이입니다. 그가 떠난 곳은 필리핀의 뚜게가라오와 라굼.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열대오지입니다. 그 곳에서 그는 한 달여 동안 그야말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보냈답니다.

아침마다 등교 준비를 해야 하는 두 딸을 두고, 뱀눈을 뜨고 째려보는 남편을 두고 훌쩍 떠났다는 그의 용기가 부러웠습니다. 책의 발문을 써준 신현림 시인의 표현대로라면 저자 김수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나가던 ‘대필업자’였습니다.

권력자와 유명 연예인의 에세이부터 공부 잘해 신의 경지에 오르는 법을 알려주는 교육서, 개나 고양이를 잘 키우는 매뉴얼북, 여드름 없애는 책, 재테크 가이드 등 13년 동안 100권 가까운 책을 썼답니다.

그러는 동안 등단 시인이었던 그는 자신의 글을 더 이상 쓸 수가 없게 됐지요. 일감이 없으면 불안해서 동시에 몇 개씩 일을 했던 생활. 고단함에 찌든 얼굴과 늘 건조한 눈이 그에게 남았습니다.

“삶에 브레이크가 필요했다. 일로부터 인간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만 현재의 내 모습을 똑바로 쳐다보는 일이 가능할 것 같았다”는 자각에 그는 “에잇, 밟아버려”를 외치고 떠납니다.

오지 사람들의 순한 얼굴과 태평한 일상 앞에서 그는 무장해제 당하고 맙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곳에서 그의 노트북은 개미집이 돼 버렸지요. 하루 종일 팔다리를 쭉 뻗고 누워 커피와 고구마, 찐 바나나를 먹으며 뭉게구름을 눈을 뒤쫓는 생활. 정물 같은 세상 속에서 눈을 뜨고 졸다가 눈을 감고 졸다가…. 안경을 벗어 가방에 넣고 시계도 풀어버립니다. “내가 갖고 있는 것들이 무용지물이 되자 나는 비로소 완전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됐다”는 게 저자의 고백입니다.

여행을 마친 뒤 그는 다시 생활인이 됐습니다. 꼬여있는 인간관계, 어려운 경제 상황 등 삶의 고민도 그대로였지요. 하지만 그는 한층 여유와 배짱을 누리게 됐답니다. “아무리 스콜이 씻어내려도 대지는 열매를 맺을 만한 거름기를 감추고 있고, 지독하게 더워도 별이 반짝이는 시원한 저녁이 기다리고 있다”는 자연의 교훈을 깨달은 덕이겠지요.

이렇게 삶을 변화시킬 에너지는 ‘쉼’속에서 자랍니다. 이번 여름, ‘안식월’은 힘들겠지만 ‘안식일’이라도 시도해보시면 어떨까요.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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