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책갈피] 100년 전에도 된장남·된장녀가 있었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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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부랑청년 전성시대
소영현 지음, 푸른역사,
320면, 1만5000원

상아탑과 출판계의 아름다운 만남이다. 대학교 박사논문이 떠먹기 좋은 단행본으로 다시 태어났다. 연구의 깊이는 유지하되 문외한도 그닥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도록 했다. 문체가 유려하거나 수사가 화려한 건 아니다. 객관적인 사실을 제시하는 데 힘을 쏟았다. 사건의 앞뒤를 꼼꼼하게 짚으면서 시대적·사회적 맥락을 보여준다. 화제성 풍부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결코 흥미 본위로 흐르지 않는다. ‘국산’ 콘텐트 부족을 호소하는 출판계가 참고할 만하다.

주제도 시의 적절하다. 최근 출판계의 주요 흐름인 한국 근대사, 일제강점기의 일상을 다룬다. 고난과 굴욕의 시대에도 사람 냄새가 진동했다는 것을 새삼 일깨운다. 서양문물이 쏟아져 들어오며 급변했던 1900년대 초반 한국인의 초상은 2000년대 오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예컨대 이렇다. 100여 년 전에도 ‘된장남, 된장녀’가 있었다. 근대화는 외모·패션의 변화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년’이 되려면 양복을 갖춰 입고 단장(短杖)을 들어야 했다. 여성이라면 드레스나 투피스 한 벌쯤을 마련해두어야 했다. 구두에 버선을 신고 도심을 걸어 다녀도 신여성은 선망의 대상. 1910년대 잡지 광고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품목은 시계와 안경, 구두·양복·모자·만년필이었다. 요즘 청춘이 와인에 빠졌다면 당시 청년은 맥주잔을 기울였다.

비판과 질타도 쏟아졌다. 허영과 사치에 물든 ‘부랑청년’에 대한 경계가 높아졌다. 하지만 청년과 부랑청년은 동전의 앞 뒷면과 같다.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출세를 꿈꾸는 고학생이 등장했고, 일본·미국 등으로 공부를 떠난 유학생도 급증했으며, 가난한 이를 돕기 위한 자선음악회도 붐을 이뤘다. 문학·미술 등에서 존재이유를 찾던 근대적 작가들이 줄을 이었고, 사해평등·사회혁명을 추구한 아나키스트들의 낭만도 넘실댔다.

이 책은 단편적 사실의 나열에 그치지 않는다. 100년 전 청년문화의 다층적 구조를 하나하나 벗겨내고, 그 주변과 여파를 두루두루 엮어낸다. 세계의 소통을 희구하며 에스페란토어 공부에 매진했던 당시 청년들의 건강함도 읽을 수 있다. 저자는 현재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로 있다. 논문 ‘미적 청년의 탄생’으로 연세대 박사학위를 받았다. 근대 청년들의 ‘가나다’를 좀더 깊게 알려면 이 책과 ‘쌍둥이’로 나온 『문학청년의 탄생』도 펼쳐보시길!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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