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與野의 치졸한 언어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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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정치는 곧 말이다.정치에 있어 말은 최고의 수단인 동시에 정치의 질(質)을 표징하는 바로미터가 되기도 한다.특히 민주정치는 말이 생명이다.말을 통해 정견(政見)을 발표하고 상대와 토론하며 국민을 설득하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기 때문 이다.
동의의 정치가 무시되고 억압의 정치가 통용되던 권위주의 시대에는 말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작았다.토론과 설득보다는 일반적인 명령과 지시가 정치 커뮤니케이션의 주종(主宗)을 이뤘고 모든 반대의견은 힘으로 다스리면 그만이었다.폭력이 언어의 기능을대체함으로써 말의 정치적 효용성은 그만큼 무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민주정치에서는 폭력에 의한 지배뿐만 아니라 일방적인명령과 지시마저 배제되기 때문에 말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중시되게 마련이다.예컨대 고대 그리스에서 수사학과 토론문화가 꽃피게된 것도 당시의 정치양식이 민주주의였기에 가능했 다.
현대 민주주의의 요람인 영국에서는 정치인의 언어행태가 정치생명을 좌우할 정도로 말의 정치적 효용성이 절대시되고 있다.자신의 정견은 물론 교양과 인격까지 세련된 언어로 논리정연하게 담아내야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것이 영국의 정 치풍토다.
말할 것도 없이 영국에서는 의원끼리 토론하거나 논쟁할 때 상대방의 인격을 모독하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발언은 삼가는 것이 하나의 철칙으로 돼있다.모든 토론과 논쟁은 시종일관 이성적으로전개되며 아무리 화가 나고 다급해도 인신공격을 하거나 폭언을 사용할 수 없다.기껏해야 유머를 적절하게 구사해 은유적으로 표현할 뿐이다.
그런데 한국정치인의 토론문화와 논쟁수준은 어떠한가.요즘 신한국당과 국민회의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이념논쟁이 방증하듯 아직도 한국정치인의 언어문화는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여야 정당의 이념논쟁은 논쟁이 아니라 하잘 것 없는 입씨 름이며 그나마 폭로성 인신공격에 치중하고 있을 뿐이다.더군다나 저속하고 원색적인 용어,때로는 욕설마저 난무하고 있어 듣는 이의 마음을몹시 불쾌하게 만들고 있다.
국민들의 정치불신을 해소하고 정치문화를 성숙시키는 일에 앞장서야 할 정치인들이 오히려 이에 역행하는 언동을 거침없이 자행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개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한국사회에서 가장 낙후된 부문이 정치라는 사실을 정치인 스 스로 실증하고 있는 셈이다.
납득할만한 근거없이 특정인을 용공(容共)으로 매도하는가 하면상대정당을 아예 「잡탕정당」으로 표현하기도 한다.상대방을 격하시킬 수만 있다면 어떤 표현도 주저하지 않는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 오늘의 한국정당이 요,정치인들이다. 여야가 이처럼 서로 비방전을 벌이는 이유는 특별히 지향하는 정치이념이나 정책목표가 있어서가 아니라 가능한 한 맹렬하게경쟁상대를 헐뜯는 것이 득표에 유리하다는 전략적 판단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국민들의 성숙한 정치의식을 간과한 잘못된 생각이요,빗나간 싸움이다.여야 정치인들의 이런 치졸한 언어전쟁은 국민들에게 혐오감만 불러일으킬뿐 결코 자신의 총선전략에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또한 정치인들의 저질 말싸움은이들이 사회지도층이란 점에서 청소년들 교육차원에서도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정녕 여야 정당들이 총선에서 이기고자 한다면 원색적인 말싸움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좀더 건설적인 정책대안을 제시하고,상대를 논리적으로 제압함으로써 국민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일에 역점을 둬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말을 세련시키고 논쟁수준을 한차원 높이는 일이 필요하다.이렇게 하는 것이 선거에서의 승리를 위해서나 한국정치의 선진화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길임을 여야 정치인들은 명심하기 바란다.
김호진 고대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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