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커 장군 동상이 서울 온 까닭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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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공원에 짓는 워커 장군의 동상 조감도. [중앙포토]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7월 월턴 워커 장군이 미군 장교들과 지도를 보면서 작전회의를 하는 모습.

미8군사령관 월턴 워커(1889∼1950년) 장군은 1950년 6·25전쟁 당시 파죽지세로 남진하던 북한 조선인민군과 낙동강 방어선에서 대치했다. 낙동강 전선은 한국전의 운명이 걸린 전투였다. 그는 45일간의 치열한 교전 끝에 낙동강을 사수, 그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킴으로써 전세를 반전시켜 ‘전쟁 영웅’이 됐다. 3개월 뒤 워커 장군은 전방 시찰에 나섰다가 경기도 의정부 축성령 고개에서 한국군 차량과 충돌해 현장에서 전사했다.

현재 워커 장군의 흔적은 그의 이름을 딴 서울 광장동 워커힐호텔과 ‘워커힐(워커의 언덕)’로 남아 있다. 대구에는 ‘캠프 워커’라는 미군부대가 있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처럼 동상은 국내에 없다.

한미동맹친선회(회장 서진섭·76)는 23일 “워커 전 초대 유엔 지상총사령관 겸 미8군사령관의 동상을 평택 이전 뒤 공원화되는 서울 용산 미8군사령부 영내에 건립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령부 건물은 미군 기지 이전 뒤에도 기념관 형태로 남는다. 서 회장은 “목숨을 바쳐 한국을 지킨 워커 장군의 희생을 기억하자는 뜻에서 동상 건립을 추진해 왔다”고 말했다.

워커 장군의 동상 건립은 4년 전부터 부산과 대구가 대상지로 추진됐으나 번번이 수포로 돌아갔다. 먼저 2005년 부산 유엔공원이 검토됐다. 그러나 일부 유엔 참전국이 특정인의 동상 건립에 이의를 제기해 불허됐다.

그 무렵 소식을 들은 대구 출신 인사들은 워커 장군의 동상은 그의 승전지인 대구에 세워야 한다는 의견을 친선회에 제시했다. 캠프 워커 뒤에 위치한 앞산공원이 건립 후보지로 올랐다. 문제는 반미 분위기였다. 당시 일부 시민단체는 맥아더 장군 동상을 ‘냉전시대의 산물’ 등으로 매도하며 철거를 주장하고 있었다. 대구에도 그런 분위기가 전해졌다.

2006년 시장 선거를 앞두고 있던 대구시는 선거가 끝난 뒤 그 문제를 검토하자며 난색을 표했다. 친선회는 김범일 대구시장이 당선된 뒤 다시 관련 서류를 대구시에 접수했다. 하지만 “안 되겠다”는 불가 통보를 받았다.

이에 친선회는 올 초 벨 한미연합사령관에게 뜻을 전했고 벨 사령관은 미8군사령부 부지 사용 승낙을 최근 내렸다고 한다. 친선회는 조만간 미8군사령부에서 동상 건립에 착공한 뒤 워커 장군의 58주기인 12월 23일 동상을 제막할 예정이다. 워커 장군의 한국식 이름을 대구를 지킨 영웅이라는 뜻의 ‘구웅수(邱雄守)’로 작명, 제막식 때 방한하는 장군의 외아들 예비역 대장 샘 워커에게 전달하기로 했다. 샘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위로 한국전에 참전했다.

6·25 참전 용사인 김정우(72·대구 내당동)씨는 “명장으로 한국 땅에서 목숨까지 바친 장군의 동상은 진작 세워졌어야 했다”며 “그동안 은혜를 잊고 지낸 것 같아 부끄럽기까지 하다”고 말했다.

워커 장군 동상은 기단부가 가로 18m·세로 13m(70여 평) 크기에 높이 3m로 맥아더 장군 동상보다 더 크다. 조각가 강대철(33)씨가 만들며 건립비는 회원들의 성금 등으로 총 10억여원이 들어간다.

대구=송의호 기자

◇한미동맹친선회=한국군과 미군, 한국 민간단체와 미군과의 유대 강화를 위해 2003년 결성된 민간단체. 회장 서진섭씨를 비롯해 전 언론인 이혜복씨, 2군사령관을 지낸 박세환 장군 등 예비역 장성 등 200여 명이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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