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歲時記로 풀어본 병자년 쥐띠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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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올해는 천간(天干)과 지지(地支)를 짜맞춘 60갑자 가운데 병자(丙子)에 해당하는 쥐띠해다.원래 천간은 씨앗이 자라나는 형상을 그린 것이다.아직 싹이 트기 전 상태로 꺼풀을 뒤집어쓴것이 갑(甲)이라면 을(乙)에서 꼬부라지기는 했 지만 들고 뻗어나기 시작해 병(丙)의 자람을 거쳐 정(丁)에 이르러 꿋꿋이일어서게 된다.선조들이 예부터 「병」자가 들어가는 해를 「시작」을 알리는 의미로 받아들인 것도 다 이같은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이다.여기에다 십이지(十二 支)의 첫째인 「자(子)」자까지 합쳤으니 올해는 이러저러한 면에서 무언가 새롭게 만들어지리라 믿어봄직하다.
쥐를 나타내는 한자의 「子」는 「滋」로도 통해 불어나는 것을뜻하기도 하고,시각으로는 새날이 시작되는 한밤중이요 열두달로 치면 동짓달에 해당된다.쥐란 놈은 본시 밤중에도 바시락거리며 활동을 하고 생명의 근원이 되는 햇살은 동지를 기점으로 퍼지기시작하는데,이 둘을 절묘하게 접속시킨 동양사람들의 지혜가 새삼스럽다. 이 때문인지 오늘날 쥐라면 으레 「양식도둑」이나 물건을 쏠아대는 「몹쓸 존재」로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옛사람들은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었던 것같다.일찍이 중국의 고대 시가집인『시경(詩經)』의 「석서(碩鼠)」편에서는 「큰쥐야 큰쥐 야/우리의 곡식을 먹지 말아/삼년동안 너를 위했건만/나를 돌보지 않는구나/가리라/장차 너를 두고/저 즐거운 땅으로 가리라(碩鼠碩鼠 無食我黍 三歲貫女 莫我肯顧 逝將去女 適彼樂土)」는 식으로 쥐를 수탈의 상징으로 본 반면 『주역(周易) 』은 「밤이면 빛을 내는 야행성 동물로 매우 민첩하고 영리하고 귀여운 물상」으로 보고 있다.
종교적으로도 기독교에서는 쥐를 악마나 사탄등 악의 상징으로 보고,유교 역시 간신이나 수탈자로 여기는 반면 불교에서는 시간의 상징으로,힌두교에서는 사려깊고 예견을 나타내는 동물로 받아들이고 있다.
생태적으로 야생동물 가운데 워낙 인간과 가까이 살다보니 미운정 고운 정이 다 들게 마련이고 제각각 입장과 소이(所以)에 따라 달리 보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아니던가.
그래서 우리의 민담이나 전설.속담등에는 쥐를 소재로 삼은 것이 많고 수수께끼나 금기어.흉기어.길조어.권장어 등에도 빠짐없이 등장한다.이 중에서도 속담은 특히 쥐의 생김새나 생태적인 면을 딴 것이 많다.「쥐가 고양이 만난 격」「쥐구 멍에도 볕들날 있다」「쥐 새끼 소 새끼보고 작다한다」등 흔한 것 말고도 「쥐구멍으로 통량(統凉)갓 굴려낼 놈」하면 남을 속이는데 놀랄만큼 교묘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고 합당하지 않은 일을 주책없이 하려는 사람에게 「쥐구멍에 홍살■ 세우겠다」고 한마디 해주면 감칠맛나는 경계가 된다.
쥐란 놈은 원래 머리가 좋고 영리해 과학이 발달한 요즘도 구제법이 딱히 없다던데 그래서 그런지 옛적부터 우리네에게는 의뭉스러움하면 「늙은 쥐」를 연상케 되고 더 나아가서는 쥐를 사람으로,때로는 사람을 쥐로 변신까지 시켜 얘기를 지 어내고 있다.가난하지만 먹이를 나눠준 집주인에게 금은보화를 가져다 준다거나 재앙을 피하게 해준다는 보은담(報恩談),또는 집주인으로 변신해 진짜로 행세하면서 갖은 곤욕을 치르게 된다는 내용의 얘기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해방전까지만 해도 황해도 서흥 땅에 서도신사(鼠島神祠)란 것이 있었다.이름 자체에서 알수 있듯 쥐를 모신 사당인데 왜적과쥐에 얽힌 전설이 남아있다.옛날 서흥에 왜적이 침입하자 한 승려가 흰쥐로 변신,적진에 들어가 활과 화살을 모 두 쏠아 패주케 한 뒤 자신은 곧장 나장산(羅帳山)에 있는 암혈(暗穴)로 들어가 죽었고 이에 사람들이 그를 서도의 신으로 삼아 제사해오고 있다는 내용이다.임진왜란과 관련된 설화에 이와 비슷한 유(類)가 많은데 이는 구국(救國)에 대 한 염원을 무엇이든 갉아대는 쥐의 속성에 기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좀 엉뚱한 얘기같지만 그 유명한 홍길동(洪吉童)이 장가드는 것도 따지고보면 다 쥐의 덕이다.길동이 저도(猪島)에 들어가 신천지를 개척해 놓고 나서 하루는 살촉에 바를 약을 구하러 망양산(芒탕山)으로 향하던 중 이상한 소문을 들었다 .백룡이라는부자가 바람에 불려 행방불명된 과년한 딸을 찾아주는 사람에게 재산의 절반을 주고 사위를 삼겠다는 내용이었다.나중에 알고보니그 딸은 바람에 불려간 것이 아니라 괴물에게 붙잡혀간 것이고 어찌어찌해 길동이 그 괴물을 죽이고 백룡의 딸과 또 한명의 여인을 함께 구해 두여인을 거느리고 살게 됐다는게 줄거리다.이 얘기는 중국 당나라때 강총(江總)이 쓴 『백원전(白猿傳)』에 실려있는 내용으로,명나라 구우(瞿佑)가 여기에 다시 살을 붙인것이 우리가 흔히 『 홍길동전』의 모태로 알고 있는 『전등신화(剪燈新話)』중의 「신양동기(申陽洞記)」다.두 작품에 등장하는괴물은 모두 땅속 깊은 곳에 살고 있는 늙은 원숭이로,주인공이이를 죽이고 세상으로 다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쥐의 활약 때 문인데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許筠)이 인용하면서 이부분을 생략했던 것이다.
흔히 쥐띠인 사람이 잘 산다고들 한다.이는 쥐의 근면성과 적극성을 따다 붙인 믿음이다.하지만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다시 한번 따져볼 일이려니와 정말 잘 살려면 쥐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해야 인간의 도리가 아니겠는가.만물의 영 장이란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말이다.
이훈종 국어학자.前건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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