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에 갇힌 여중생 가장의 자살] "차라리 고아였으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차라리 고아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걸…차라리 거리의 풀 한 포기로 태어났으면 좋으련만…차라리 바람에 휘날리는 모래 한 줌으로 태어났으면 좋으련만…."

6~7평 남짓한 작은 슬레이트 집. 누우면 발이 닿을 듯한 비좁은 안방. 창문도 없어 늘 어둡고 침침한 공부방. 이곳에서 거동이 불편한 홀어머니를 모시고 어린 두 동생과 살아야 했던 15세 소녀가장 鄭모(15.평택 H중 3년)양에게 가난은 너무도 견디기 힘들었다.

문학소녀를 꿈꾸던 鄭양은 지난달 22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 통복동 자신의 집에서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옆에는 평소 소중하게 아끼던 일기장이 놓여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안 계신 소녀가장이다. 고등학교 입학금조차 없는 가난한 집의 둘째 딸. 이런 나에게 미래가 있을까…."

"일본어도 컴퓨터도, 음악과 기타도 배우고 싶다."

"사랑하는 엄마, 죽는 생각 자체가 불효라는 것 알아. 하지만 내가 없어지는 것이 돈이 덜 나가 다행일지도 몰라."

"내 소원은 내가 운전하는 차에 엄마 태우고 드라이브하는 거였어."

죽음을 선택하기 보름 전부터 빽빽이 적은 일기장에는 지독한 가난 속에서 삶에 애착을 가지면서도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없는 절망감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러면서 鄭양은 "나를 알게 되면 (친구들이) 도망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를 감싸고 상품처럼 만들어 버렸지"라며 자신의 불우한 처지가 친구들에게 알려질까봐 괴로워했다.

鄭양이 소녀가장이 된 것은 6년 전인 초등학교 3년 무렵. 밖으로 겉도는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가 고물상.연탄배달.식당종업원.막노동을 하며 겨우 겨우 생계를 잇던 중 1998년 어머니마저 뇌종양으로 쓰러지면서부터였다. 아버지는 노숙자로 전전하다 2년 전 지병으로 숨졌다. 이후 가족들은 정부에서 나오는 생계보조비 월 70만원으로 생활해 왔다.

그러나 어머니 병세가 갈수록 악화돼 치료비로 4000만원가량 빚을 지면서 지난해부터는 아예 병원치료를 포기했다. 딸의 마지막날에도 어머니는 돈을 빌리기 위해 목발을 짚고 이곳저곳 헤매다 밤 늦게 집으로 돌아와 딸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집안에 화장실이 없어 밖에 있는 재래식 공동화장실을 사용하는데 딸이 추운 겨울이나 한밤중에 무서워 가지 못할 때는 마음이 미어졌습니다."

어머니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무런 군말 없이 온갖 집안일과 동생들을 돌보는 착한 딸이자 실질적인 가장이었다"고 말했다.

담임교사 류호석씨도 "평소 명랑하고 성격이 적극적이어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성적도 상위권이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죽기 직전 두 동생과 어머니를 위해 밥을 가득 지어놓은 鄭양의 유해는 주변의 도움으로 지난달 25일 넓고 편안한 곳에서 행복하게 살라는 뜻으로 서해바다에 뿌려졌다.

鄭양이 다니던 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3000여만원을 모아 현재 보증금 200만원, 월세 20만원짜리 집에 살고 있는 가족에게 조그만 전셋집을 마련해줄 계획이다.

엄태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