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마을/결혼식주례] 서른에 주례라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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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식 시간이 다 돼 가는데도 주례를 하기로 약속한 목사님이 나타나지 않았다. 급히 전화를 드리니 다음주 토요일로 알고 있었단다. 큰일이 나고 말았다. 당장 출발을 해도 의정부에서 서울까지 도저히 올 수 없는 시간이었다. 집안의 어른들은 일을 어쩌다 이렇게 했느냐고 핀잔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 집안 어른이신 외삼촌께서 이젠 어쩔 수 없으니 나보고 주례를 맡으라고 하셨다. “예? 제가요?” “그래. 자네는 교회 전도사니까, 할 수 있지, 안 그런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는 신랑의 바로 위 매형이었다. 게다가 아직 새파란 서른 살인데 어떻게 처남의 주례를 선다는 말인가.

등에서 식은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교회 전도사지만 아직 한 번도 주례를 서 본 적이 없으니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예식 시간은 다 됐고, 식장에는 다음 결혼 순서가 줄줄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엉겁결에 단상에서 “신랑 입장” 하고 외쳤다. 신랑이 힘차게 걸어 들어와 주례를 쳐다보더니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내친 김에 신부 입장을 시켰다. 그럭저럭 몇 가지 순서는 잘 진행했는데 막상 주례사를 하려니 도무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백지장이 되고 만 것이다.

몇 번인가 헛기침을 하고 난 뒤에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모를 주례사를 끝냈다. 신랑 신부 인사, 행진까지 시키고 내려오니 여름도 아닌데 온몸이 목욕을 한 것처럼 젖어 있었다. 바람이라도 쐴 양으로 밖으로 도망가려 하는데 하객들이 말했다. “오늘 주례사가 너무 훌륭했어요” “짧으면서 의미 있는 내용이 아주 좋았어요” “지금까지 들어 본 주례사 중에 최고였네”….

그러나 아직까지도 나는 그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없다. 아마도 내가 주례사를 아주 짧게 해서 그랬을 거란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이제 나도 수많은 결혼식 주례를 맡아 봤지만 아직도 그날은 잊을 수가 없다. 처남댁은 지금도 말을 한다. 신부가 주례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어 몰랐는데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라서 궁금해 죽는 줄 알았다고. 아무튼 처남 부부는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고 딸 둘은 대학생이 되었으니 주례를 잘 본 것 아닌가?

김학성(57·목사·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상동)

6월 27일자 주제는 공주병·왕자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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