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을 강력한 무기로 활용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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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촛불 시위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정부는 조심스러워 하지만 이미 ‘쇠고기 정국’은 재협상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한 번 실수는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두 번째 실패는 용납될 수 없다. 재협상 국면에서 정부는 어떻게 협상에 임해야 할까? 재협상을 관철시키기 위해 우리가 쓸 수 있는 무기는 무엇일까? 협상전문가 김기홍 교수가 이코노미스트에 긴급제언을 해 왔다.


“역사의 현장이 불같이 타오르는데…(중략)…나도 나가 촛불을 들겠다.”
누가 한 말일까? 동맹휴업을 결정한 대학생, ‘우리는 바보가 아니다’라고 외치는 10대, 직업을 잃고 길거리를 헤매는 실직자나 중소기업가, 민노총 회원?

다 틀렸다. 보수의 원조라고 자칭하는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 그가 최근의 촛불 물결을 보면서 한 말이다. 놀랍다는 말을 떠나 미국산 쇠고기 시장개방을 둘러싼 ‘사태’는 이 정도까지 이르렀다.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수입 쇠고기의 안전성을 보장하기 위해 실질적인 재협상을 하는 것밖에 없다.

미안하지만 정부가 말하는 ‘민간의 자율적인 수입규제’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돈’을 벌려고 하는 민간의 영업행위가 언제까지 ‘자율적으로’ 규제되리라고 믿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협상은 쉽지 않다. 과연 재협상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재협상의 장이 펼쳐지더라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 정말 막막하기 때문이다.

제스왈드 살라쿠제(Jeswald Salacuse·미국 터프츠대학 교수)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협상’이 기대 이익을 나누는 것이라면 ‘재협상’은 기대 손실을 나누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재협상은 가능한가?

정부는 말한다. ‘재협상은 불가능하다. 국가 간 신뢰가 손상될 뿐 아니라 심각한 통상마찰의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재협상의 선례가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는 종종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

꼭 작년 이맘때 미국은 민주당의 새 무역정책을 이유로 양국의 대표가 서명한 한·미 FTA 협정문에 대해 재협상을 요청해 왔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누구도 미국의 이 요청에 대해 ‘양국의 신뢰 손상이 우려되고 심각한 통상마찰의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요청에 응했을 따름이다. 우리는 재협상을 요청하면 안 되는가?

최근 코스타리카의 야당 지도자 오톤 솔리스(Otton Solis)는 미국 정부에 코스타리카가 포함된 중앙아메리카 FTA(the Central American FTA)의 재협상을 강력히 요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은 페루 의회의 비준까지 끝낸 미국과 페루의 FTA 협정을 수정해 줄 것을 페루 정부에 요청했다. 미국의 이런 재협상 요청은 국회의 동의를 얻은 국가 간 협정도 재협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훌륭한 전례가 된다. 그러니 우리가 왜 미국에 대해 재협상을 요청할 수 없는가?”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결정 과정에서 오바마와 힐러리는 동시에 NAFTA의 재협상을 강력히 주장했다. 물론 오하이오주 예비선거를 앞두고 이곳 유권자의 표를 얻기 위한 목적이 강했던 것이지만, 이런 주장에 대해 멕시코 노조는 다음과 같이 반기면서 말했다.

“NAFTA가 재협상되지 않으면 멕시코는 NAFTA에서 탈퇴하도록 하겠다.”

이런 재협상 사례는 하나 둘이 아니니 더 이상 나열하는 것은 진부한 일이다. 그러니 차라리 ISA(International Studies Association) 2005년 연차총회에서 발표된 논문에서 나온 다음과 같은 말이 더 설득력 있을 수 있다.

‘국가 간 협약의 재협상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the renegotiation of treaties is not all that uncommon).’ 이마저도 구차하다면 ‘모든 것이 협상 가능하다’는 허브 코헨의 말은 어떤가? 당연히 협상 가능한 대상에는 이전의 협상 자체도 포함된다. 그래서 말한다. 재협상은 가능하다.

재협상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쇠고기 재협상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미국을 재협상의 장(場)으로 나오게 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말해 미국이 재협상에 응하느냐의 여부는 역설적으로 바로 우리에게 달려있다.

우리 정부가 재협상을 하지 않으면 정말 ‘큰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그리고 그런 인식을 미국에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면 재협상은 시작될 수 있다.

이것은 미국이 여론과 국민의 힘에 근거한 정치를 이해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다행히 미국은 이런 메커니즘을 ‘충분히’ 알고 이해하는 나라가 아닌가?

먼저 ‘인식’의 문제. 취임한 지 100일 된 대통령의 지지율이 17%라면, 촛불로 대변되는 국민의 의사 표시가 단순한 쇠고기 수입을 넘어 정부에 대한 신뢰 문제로 번진다면, 이것은 단순한 ‘소통’의 문제가 아니라 ‘정권 차원’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정부는 정말 이렇게 인식하고 있는가? 이런 위기를 느끼고 있는가? 이런 인식 없이 단순히 ‘30개월 이상 쇠고기의 수출규제 요청’과 같은 방식에 집착한다면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을 수 있다. 그러니 ‘재협상을 하지 않으면 정말 위기가 올 수 있다’는 인식을 해야 한다.

다음은 전달의 문제. 하지만 이런 인식을 협상의 파트너인 미국에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면 재협상이 시작되지 못하거나, 혹 재협상이 시작된다 해도 ‘예상치 못한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전달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국내적으로 기대 이상의 과감한 인적 쇄신을 통해 우리 정부가 이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 인적 쇄신은 사태의 마무리 국면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태의 초기 국면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기대 이상의 과감한’이라는 부분이다. 위기가 오면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럴 때 미국은 한국이 현 상황을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둘째, 이런 간접적인 시그널과 함께 미국에 특사를 파견하는 형태로 한국의 현 상황을 가감 없이 직접 알릴 필요가 있다. ‘민심’이라는 여론이 힘을 발휘하는 사회라는 공통점을 가지는 한 이런 전달이 성공하지 못할 가능성은 낮다.

이런 과정에서 버시바우 주한 미 대사의 역할은 중요하다. ‘광우병에 대한 과학적 사실을 배우기 시작해야 한다’는 다소 성급한 그의 언급이 여론의 역풍을 맞기는 했으나, 그가 한국의 현 사태를 어느 정도 정확히 이해해 본국에 전달하는가 하는 것이 재협상의 시작과 관련된 하나의 관건이 될 수 있다.

다행히 미 대사는 지금 쇠고기 문제가 단순한 시장개방 문제가 아니라 반미와 같은 엉뚱한 문제로 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는 듯 보인다. 아니면 그렇게 하도록 청와대 수석들처럼 ‘촛불’의 현장이라도 체험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 정부의 ‘인식’과 그 인식을 미국에 제대로 ‘전달하는’ 문제, 이것만 충분히 된다면 재협상은 시작될 수 있다. 문제는 우리 정부가 때를 놓치지 않고 과연 이것을 효과적으로 시행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렇게 하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외부협상 바로잡는 내부협상

▶지난 4월 18일 민동석 차관보가 미국 쇠고기 수입 협상 타결 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오해하지 말자. 재협상이 시작된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문제 해결의 시작일 뿐이다. 재협상 과정에는 일반적인 협상과정에 작용하는 협상과 협상력에 대한 모든 이론이 그대로 적용된다. 그런 점에서 반드시 지적해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바로 ‘촛불’로 대변되는 내부협상의 힘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국가 간의 협상은 두 나라의 협상가들 사이에 이뤄지는 외부협상과, 외부협상을 전후해 국내에서 이루어지는 내부협상으로 나뉜다.

내부협상은 협상 의제에 대해 국민(이해단체 포함)의 의사를 수렴하는 과정 혹은 협상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정리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협상에서 외부협상의 결과는 내부협상의 과정과 절차에 크게 의존한다.

미국과의 실질적인 재협상(그 명칭은 재협의, 재논의, 추가논의 등 무엇으로 불려도 좋다)이 시작된다면 그것은 위에서 말한 대로 정부의 ‘인식’과 ‘전달’에 힘입은 것이다. 하지만 그 인식과 전달을 가능하게 한 숨은 원동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내부협상의 힘이다.

쇠고기 협상은 한·미 정상회담 몇 시간 전에 서둘러 체결된 외부협상일 따름이고, 촛불 문화제는 다름 아닌 그 잘못된 외부협상을 바로잡자는 내부협상이라는 것이다.

재협상을 시작하게 한 원동력이 촛불로 대변되는 내부협상의 힘이었다면, 재협상 과정에서 우리의 입장을 효과적으로 대변하는 것도 내부협상의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재협상 통해 돈독한 관계 될 수도

무엇보다 먼저 재협상의 성격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미국에 재협상을 요청하게 된 것이 쇠고기 시장을 개방하지 않거나, 개방하기로 한 쇠고기 시장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키는 것이 아니란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 점은 재협상을 시작하기 전에 양국이 합의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한국이 과거 미국의 요청에 의해 한·미 FTA 협정을 재협상한 것처럼 미국은 한국의 ‘긴박하고도 절박한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쇠고기 시장개방 협상을 다시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 기본 바탕은 한국과 미국의 ‘장기적인 우호관계’에 기반을 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따라서 이 문제가 양국 간의 관계를 해치거나, 불필요한 반미나 비합리적인 통상마찰로 번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우리 정부는 다음과 같은 점을 미국에 부단히 강조해야 한다.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재협상에 의해 단기적이고 부분적인 손실이 있을지는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매우 큰 쇠고기 시장을 확보함으로써 결국 미국에도 이득이 된다.”

그 다음, 재협상을 통해 새로운 가치가 창출되도록 해야 한다. 재협상은 기대 손실을 나누는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재협상 과정과 절차가 충분히 만족스럽다면 재협상을 통해 양국 간에 새로운 협상 이익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 협상 이익은 유형적인 것일 수도 있고, 무형적인 것일 수도 있다.

미국의 경우 쇠고기 재협상을 허용함으로써 차후 한국과의 통상협상에서 다소 불균형적인 요구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래서 혹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우리가 쇠고기 재협상을 한다면 한·미 FTA 자동차 부문에서 추가적인 양보를 해야 하고, 미국의 무기를 필요 이상으로 구입해야 한다고.

하지만, 생각해 보자. 만약 미국이 한·미 FTA 재협상을 요구한다면 미국의 재협상 요청 의제(자동차 시장의 추가 개방)에 우리 관심사항(예컨대 투자자와 정부 간 제소 조항)을 포함시켜 다시 논의할 수도 있다.

혹은 미국의 무기를 정도 이상으로 구매해야 한다면, 우리는 다시 미군기지 이전 비용을 그것에 연계시킬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우리 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재협상을 통해 창출되는 새로운 가치는 무형적인 것에 집중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오히려 이런 과정을 통해 현 정권이 그토록 원하는 ‘돈독한 한·미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다면 그것은 비 온 뒤에 땅 굳는 격이다.

재협상 논의 그 이후

미국과의 통상협상이 시작된 1980년대 이후 우리 정부가 행한 최악의 협상이 이번 쇠고기 시장개방 협상이다. 하지만 그 최악의 협상을 최고의 협상으로 바꾸기 위한 과정이 지금 진행되고 있다.

그 과정은 다름 아닌 ‘촛불’로 대변되는 내부협상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5년 간 모든 정책 혹은 협상을 시행함에 있어 다음과 같은 사항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내부협상 과정을 거치지 않은 외부협상은 한낱 거짓에 지나지 않는다.” 무슨 말일까? 주권자가 동의할 수 없는 협상은 언제든지 재협상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고객이 만족하지 못하는 제품은 언제든 반품될 수 있다는 것을 CEO 대통령이 모를 리 없지 않은가.

김기홍 부산대 경제학과 교수·협상 컨설턴트
gkim@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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