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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졸중 1년 만에 일어선 소설가 김승옥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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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꼭 1년 1개월 만이다. 지난해 2월 말 뇌졸중으로 쓰러졌던 '무진기행'의 소설가 김승옥(63)씨가 긴 겨울잠 같았던 투병생활을 뒤로 하고 활동을 재개했다. 어린 시절 추억과 성장과정, 문학에 투신(投身)하게 된 계기, 갑작스러운 '하나님 체험' 고백 등 문학과 인생의 고비와 전환점을 밝힌 글들을 모은 산문집이 이달 중순 '작가' 출판사에서 출간된다.

물론 산문집에 실리는 글들은 발병 이후 쓴 게 아니다. 과거 계간지 '세계문학'과 국회 발행 월간지 '국회보', 기독교 관련 잡지들에 실렸던 것들이다.

김현.서정인.이청준.김치수.염무웅 등 쟁쟁한 문필가들을 배출한 1960년대 초반 서울대 문리대생 중심의 문학 동인지 '산문시대'의 창간 전후를 밝힌 4부 '산문시대 이야기'도 73년 서울대 학보인 '대학신문'에 연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쓰러진 직후 혼자서는 거동하기 힘들었던 김씨가 슬그머니 병상에서 빠져나와 자전적 산문집을 의욕적으로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김승옥 문학의 향취를 아직 잊지 못하는 사람들은 반갑기만 하다.

유신 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70년대 김씨가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던 시인 김지하씨는 산문집에 붙인 서문에서 "서문 글을 부탁받고 깜짝 놀랐다"며 "소설을 못 써도 좋으니 부디 건강하라"고 당부했다.

산문집을 통해 그의 일대기를 따라가다 보면 무신론자에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의 돌연한 변신, '무진기행''서울, 1964년 겨울' 등 대표작들에 배어 있는 허무의식의 배경 등 궁금했던 점들을 이해하게 될 것도 같다.

김씨는 지난해 12월 원고뭉치를 들고 불쑥 출판사를 찾았다. 쓰러지기 전인 지난해 초 글을 주겠다고 한 출판사와의 약속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서울 강북구 자택에서 서대문구 출판사까지 한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를 지하철을 타고 일주일에 한차례 이상 방문하며 산문집 출간을 준비해 왔다.

지난달 31일 출판사 부근 추계예술대 교정에서 만난 김씨는 몰라보게 건강해 보였다. 걷는 동작에 부자연스러운 점은 전혀 없었고, 양 볼의 붉은 기운은 보기 좋았다. 그러나 단어나 짧은 문장을 말할 때는 발음이 정확했지만 말이 길어지면 더듬기도 했고, 아무래도 복잡한 사안을 설명하는 데는 벅차했다.

무리를 피해야 하는 그의 건강을 고려해 40여 분간 진행된 인터뷰에는 필담을 곁들였다. 김씨는 그림까지 그려가며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가장 궁금한 건강상태에 대해 묻자 대뜸 손바닥 안에 들어가는 크기의 수첩을 꺼내 펼쳐 보였다. '언어요법실''한방재활의학과''동서협진실'같은 단어가 적힌 쪽을 보여준 뒤 일주일에 한차례 병원을 찾아 언어 치료를 받고 있고, 약도 하루 세차례씩 꼬박꼬박 먹는다고 설명했다. "조, 조금씩, (말하기가) 나, 나아져… "라는 힘겨운 대답이 뒤따랐다. 김씨는 올해 초 세종대 교수직도 그만두었다.

이어 펼쳐보인 종이에는 '술 ×. 부부관계 ×. 마음을 비움 ○. 운동과 식생활 철저히'라고 적혀 있다. 일종의 생활 수칙.투병 수칙이다.

출판사 손정순 사장은 "지난해 말 선생님을 처음 뵌 후 언어가 좋아지는 게 눈에 띌 정도다. 특히 기억력과 꼼꼼함은 깜짝 깜짝 놀랄 때가 많다"고 말했다.

김씨는 '쓰러졌던 순간'을 설명하며 목소리가 높아졌다. 가장 절친했던 친구 이문구씨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빈소에)간다, 가야지 하다가 팍- 쓰러졌다"고 말했다. 산문집을 출간한 계기를 궁금해 하자 김씨는 자신에게는 최고인 신앙과 평생의 업인 문학에 대한 생각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소설은 안 쓰실 거냐"고 묻자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김씨는 과거 문란한 탤런트 아내와 대학 시간강사 남편의 결별을 다룬 중편 '서울의 달빛 0장'의 뒷이야기, 80년 동아일보에 연재하다 중단한 장편 '먼지의 방' 등을 이어 쓰고 싶다고 했다. "해냄 출판사에 원고빚이 있다"며 "올해는 힘들 것 같고 내년 12월에는 작품을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밝혔다.

"요즘 어떤 일이 가장 즐거우냐"는 질문에 "TV 시청"이라고 대답한 김씨는 대장금이 끝나서 섭섭하지만 대신 대통령 탄핵 관련 뉴스가 재미있다고 말했다.

소설을 다시 쓰기로 했다지만 김씨 마음의 중심은 여전히 신앙에 있는 듯했다. 김씨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산문집의 제목을 신앙 간증 경험을 밝힌 1부 제목인 '내가 만난 하나님'으로 정하고 싶어한다고 손사장이 귀띔했다. 김씨는 책에 작가의 말과 함께 직접 그린 삽화 몇 점을 덧붙일 생각이다.

글=신준봉.사진=신동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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