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욱 기자의 ‘경제로 본 세상’] ‘왕의 여자’는 쫓겨나도 ‘귀족의 부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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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권력투쟁이 점입가경이다. 몇몇 권력자가 호가호위한다며 또 다른 권력자가 질타하고 나섰다. 인사가 만사인데, 이들이 전횡을 하는 바람에 이명박 정부가 취임 100일 만에 거덜나게 생겼다는 것이다. 자연스레 몇 달 전 본 영화 ‘천일의 스캔들’이 떠올랐다.

여주인공 앤 볼린이 “왕의 정부(情婦)가 될 계획”이라고 말하자 그녀의 동생 메리는 “정부 자리에서 밀려나면 비참해진다”며 반대했다. 그러자 앤은 “정부 자리에서 쫓겨나면 귀족 부인으로 가면 되지”라고 반박했다. 당시엔 귀족들이 왕의 정부를 서로 부인으로 데려가려 했던 모양이다. 하긴 이와 비슷한 사례는 오늘날에도 수없이 많다. 얼마 전 미국 뉴욕주지사와 관련한 스캔들이 터졌을 때도 그랬다. 대통령 꿈까지 꿀 정도로 야심 찼던 사람은 스캔들 한 방에 무너졌지만 상대방이었던 성매매 여성은 일약 유명인사가 됐다. 클린턴 전 대통령과 스캔들이 있었던 모니카 르윈스키, 미국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와 사귀었던 말라 메이플스 등 한둘이 아니다.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이다. ‘더럽혀진 몸’일수록 인기가 높아지니 말이다.

그러나 경제학은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할 수 있다. 왕은 여자에게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다. 왕에 대한 여성들의 수요가 많다는 얘기다. 이렇게 수많은 여성 가운데 선택된 여성이라면, 왕이 선택했다는 그 자체가 그 여성은 정말 괜찮은 여자라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다른 사람들도 권력자나 부자들은 매력적인 여성을 선택한다고 믿는다. 이렇게 선택된 여성들은 이후 팔자가 확 달라진다. 상품으로 치면 명품의 반열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시장 구조나 가격 형성 체계가 과거와는 판이하게 달라진다는 얘기다. 그러니 권력자나 부자 남성 주위에서 얼쩡거리는 여성들이 끊이질 않는 것이다. 이걸 경제학에선 ‘짝짓기 시장의 경제학’이라고 한다.

작금의 권력투쟁도 이 경제학으로 이해할 수 있다. 좋게 말해 권력투쟁이지 실제론 대통령의 정부가 되기 위한 전쟁이다. 앤 볼린이 헨리8세의 눈에 들어 권력과 명예를 손에 쥐려 했던 것과 다를 바 없다. 일단 왕의 정부가 되면 그 다음부터는 만사형통이다. 쫓겨나도 ‘귀족의 부인’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권력투쟁도 마찬가지다. 한번 대통령의 정부가 되면 그 후에는 쫓겨나도 준치 행세는 할 수 있다. 그게 관행이었으니 그리 잘못된 기대도 아닐 게다. 그러니 죽기살기로 정부 전쟁에서 이기려 드는 것이다. 그러나 앤의 야심에 헨리8세는 국교를 바꿨다. 나라는 엄청난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애꿎은 사람들이 수없이 죽어나갔다. 대통령의 정부 전쟁에 뛰어든 이들의 속내도 마찬가지일 게다. 야심만 채운다면 나라야 어찌 되든 관심 없을 게다. ‘짝짓기 경제학’이 틀리지 않았다면 분명히 그럴 게다.

김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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