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중풍] IT가 효자여 ~ 똑똑해진 보조 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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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스톡홀롬에서 혼자 사는 마리(78) 할머니는 1년 전 중풍으로 쓰러졌다. 맑았던 머리가 때때로 멍해지고 기억력도 떨어졌다. 외출할 때 가스불을 끄거나 문을 잠그는 일을 잊어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약 먹는 것을 깜박 잊고 먹은 약을 또 먹기도 했다. 인근에 사는 딸 파울라(44)는 6개월 전 몇 가지 건강 보조기기를 빌려다 어머니 집에 설치했다. 모든 비용은 정부보조금제도를 이용했다. 스웨덴에서 노인의 독립생활을 돕는 장치는 국가가 비용을 전액 지원한다. 간병인을 두거나 시설에서 사는 것보다 비용을 절감할 수 있어서다.

IT를 이용한 다양한 보조도구는 이제 할머니의 일과에 없어서는 안 될 ‘효자’가 됐다. 할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루 일과가 적힌 특수 화이트 보드를 본다. 일과는 딸이 써놓은 것이다. 화이트 보드 한쪽에 나란히 쓰인 숫자에 불이 들어오면 밤낮과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다. 숫자 옆에는 식사 준비, 운동 등 해야할 일이 그림과 글로 표시돼 있다.

‘삐리리~’ 하루 세 번 식사 후에는 약 먹는 기계가 할머니를 부른다. 익숙한 멜로디를 듣고 버튼을 누르면 할머니가 먹어야할 혈압약·혈관약·심장약·비타민이 한번에 튀어나온다. 일주일에 두 번 집에 와서 할머니를 보살피는 방문 간호사가 미리 약을 종류와 양에 맞춰 넣어 놓은 것이다.

할머니의 전화기는 일반 전화기보다 훨씬 크고 숫자가 없다. 가로, 세로 5㎝가 넘는 큰 버튼마다 딸과 아들, 친구, 방문 간호사의 얼굴 사진이 붙어있다. 번호가 기억나지 않아도 얼굴을 보고 버튼만 누르면 원하는 사람과 통화할 수 있다. 현관으로 나가는 복도 벽에는 타일 한 장 크기의 그림 세 개가 나란히 붙어있다. 각각 가스레인지·다리미·테라스로 나가는 문이 그려진 이 장치는 할머니가 외출 전 잊지 말아야 할 일을 알려준다. 가스불을 끄지 않고 나가면 그림에 파란 불이 들어오면서 “가스불을 끄세요”라고 음성으로 경고한다.

현관문을 열면 문에 달린 센서가 “전화기와 지갑을 가져가세요”라고 알려준다. 이 센서는 필요할 때마다 다른 내용으로 바꿔 녹음할 수 있다. 열쇠로 문을 잠그자 열쇠고리에 달린 그림이 잠금 표시로 바뀐다. 집을 떠난 후 문을 잠갔는지 기억나지 않아 불안해하는 할머니를 위한 장치다.

IT는 마리 할머니와 같은 노인들의 건강을 모니터링하는 역할도 한다. 몸이 불편한 노인이 정기적으로 병원을 방문하거나 왕진을 받지 않고도 집안에 설치한 컴퓨터와 센서를 통해 건강의 이상이나 응급상황이 전달된다. 현재 스웨덴 전역의 260개 지자체 중 50개는 집에 설치된 컴퓨터를 통해 노인을 돌보는 사업을 한다.

스웨덴 보조공학연구소의 마리아 수아레스 연구원은 “지금 노인을 위한 기술개발을 하지 않을 경우 미래에 이들을 보살피기 위한 경제적 부담이 더 커질 것”이라며 “이를 위한 유럽연합(EU)차원의 공동 프로젝트도 진행중”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 김창규·김은하·백일현·김민상·이진주 기자, 황세희 의학전문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편집=안충기·이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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