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칼럼>5.18특별법 제정에 부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과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모든 민족이 안고 있는 공통의과제다. 스탈린 체제하에서 수십년동안 살았던 모든 국가들은 현재 이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2차대전후의 독일과 일본에서도 이문제는 제기됐다.독일과 일본으로부터 해방됐던 나라들도 전후 점령자들에게 빌붙어 협력했던 반역자들에 대한 처리문제를 놓고 고심해야 했다.
그리스에서는 고위장교들의 쿠데타 정부가 실각한 이후에,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는 프랑코와 살라자르의 독재가 종식된 후에,그리고 칠레에서는 피노체트 이후 과거청산 과정을 겪어야 했다.
민주주의 시대를 맞은 한국도 독재정권,특히 광주의 유혈극과 관련해 어떻게 과거를 정리하느냐 하는 문제를 피할 수 없게 된것이다.이것은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진 문제다.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그의 역사책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기원전 404년 아테네에서의 민주주의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스파르타인들은 도시를 점령하고 무시무시한 괴뢰정권을 세웠다.
30명의 폭군으로 대표되는 독재자들은 공포통치를 통해 아테네 시민들을 억압하고 약탈했으며 살해했다.
트라시불로스 장군이 스파르타인을 몰아냈을 때 아테네에 민주주의는 다시 찾아왔다.
그가 직면했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독재자들과 그들의 조력자.
동조자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분노한 아테네 시민들은 보복을 원했다.그들은 재판과 교수형과추방을 외쳤다.
그러나 참혹한 내분과 몇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내전이 벌어질 것을 염려한 트라시불로스는 그같은 시민들의 보복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가장 악독한 몇명의 죄인들만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을 사면했다.나중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이러한 절도(節度)있는 모습을 아주 높이 평가하면서 이렇게 썼다.『그들은과거에 겪었던 운명의 회오리를 매우 품위있고 정 치적으로 현명하게 극복해 냈던 것같다.』 이러한 절도로 인해 아테네에서는 계급과 정파간의 화해가 이뤄졌으며 이에 기초해 아테네 민주주의는 그 후 거의 100년동안 평화를 누렸다.
이렇게 과거의 어두운 역사를 의연하게 극복해낸 민족들은 그리많지 않다.더욱이 피로 물든 2 0세기에는 그런 민족을 찾아 보기가 아주 어렵다.
매우 단순한 과거 극복관이 널리 퍼져 있는 우리시대에는 흔히보복과 처벌이 과거극복의 방책으로 삼아진다.하지만 실제 역사를보면 그러한 격렬한 마음은 대개의 경우 곧 무뎌지고 만다.청산작업의 고난으로 인해 과거의 고통은 잊혀져버린 다.현재에 모든눈길이 몰려 있으므로 과거를 파헤칠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협력 혹은 동조했던 사람들의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들 모두를 구석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불가능해진다.연루된 자가너무 많으면 청산의 분위기가 쉽게 식고 마는 법이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국민성에 좌우된다.프랑스인들은 1944년에 1만명 이상의 나치협력자들을 처형했다.이탈리아인들은 1만2,000명의 파시스트들을 죽였다.
이런 걷잡을 수 없는 광기 속에서 정의의 감정은 점차 소실된다.그 후에는 망각의 커튼이 내려진다.그러므로 그때까지 살아남은 자들은 더이상 노심초사할 필요가 없었다.
프랑코 이후의 스페인과 야루젤스키 이후의 폴란드는 가톨릭의 현명한 가르침을 좇아 대량처형과 시간을 허비케 하는 힘든 재판들을 하지 않았다.
2차대전후 승전국들이 뉘른베르크와 도쿄(東京)에서 최악의 전범자들을 몇명 처형한 후 과거청산 작업은 곧 마무리됐다.
일본인들은 자랑스럽지 못한 과거를 곧 잊어버렸다.독일인들은 일정 기간 자기 민족의 죄과를 재판을 통해 평가하려고 노력했다.그리하여 서독에서만도 3만5,000명이 고소당했으며 9,000명이 감옥에 갇히고 50만명이 벌금형에 처해졌다 .2만5,000명은 재산을 몰수당했으며 2만2,000명이 공직을 박탈당했다.동독지역에서는 3만건의 전범재판이 시도됐으며 20만명의 나치들이 행정.경제분야에서 쫓겨났고 500명이 사형됐다.
그러나 4~5년이 지나자 전범을 추적하자는 열기가 식었다.파괴된 나라를 재건하는 일이 더 급했던 것이다.
***巨物들은 다 빠져나가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치의 꼬임에서 벗어나 민주주의 질서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이미 오래전에 잘못된 생각을 버린 사람들을 구태여 처벌해야 했을까.
동독공산주의 정권의 붕괴로 인해 독일인들은 20세기에 두번째로 과거문제를 해결해야할 과제를 짊어지게 됐다.
냉철한 현실주의에 입각해 지난 몇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따져보건대 탈(脫)슈타지(동독비밀경찰)화 작업 또한 40년전의 탈나치화와 같은 길을 걷게 되리라고 예상된다.
40년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재판을 통한 과거의 극복에는 한계가 있다.법적 시효의 규정이 있고 법률의 소급적용금지 원칙이있다. 5년전 독일 통일후 구동독정부의 통치범죄를 둘러싸고 3만7,000건의 조사가 벌어졌으나 350건만이 기소됐고 80건의 판결이 났다.구동독 당시 정치적인 책임자들은 대부분 석방됐다.잔챙이만 걸려들었다.
거물들은 다 빠져나갔다.아마도 머지않아 소송 사태가 줄어들고죄과의 추적이 중단될 것으로 보인다.이러한 현상에도 나름대로 논리와 정당성이 있다.
한때 잘못된 행위에 가담했던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의 최후 몇년간 개혁을 적극 지지했다.그들은 「후퇴의 영웅들」이었으며 결과적으로 변혁에 기여했다.
***主犯은 최후까지 추적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사면시켜 주자고 하는 것도,심지어 모든 일을 잊어버리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은 최후까지 추적돼야 한다.그리고 과거극복의 핵심은 바로 기억하는 행위에 있다.
그러나 법정과 수사집단,국정조사위원회와 급조된 심판소등은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억을 관장하는 곳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역사가와 작가.시인.예술가들이 기억을 살리는 사람들이다.그리고 무수한 개인들 또한 기억을 지니고 있다.
배우는 과정이 처벌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다.이것이 교훈이다.엘살바도르 게릴라출신의 한 인사는 『우리는 과도하게 폭력을 사용했다.지금 우리는 성찰이 필요하다』고 술회했다.정의가 평화에 기여하기보다 평화가 정의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트라시불로스의 오랜 교훈이다.
[정리=한경환 베를린특파원] 대량처형 정의도 퇴색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