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앞에선 공부하는 모습 노출
분위기 만들어 줘"
경남의 작은 어촌마을에서 태어난 서씨는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한글을 읽지 못했다. 생활고에 지친 부모는 딸자식 공부엔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나마 여덟 살 터울의 언니가 “저능아”라고 구박하며, 한글을 깨치게 해준 게 고마울 뿐이다. 6학년 때 언니가 시집가면서 첫 역경이 찾아왔다. 집 살림살이가 4남2녀 중 막내딸인 서씨 몫으로 떨어졌다. 새벽 5시면 일어나 밥 짓고, 한겨울에도 강가에 나가 얼음물로 빨래했다. “왜 나만 시키느냐”고 대들었지만 매만 벌 뿐이었다. ‘박사’를 목표로 잡은 건 이때였다.
담임이 “박사가 되면 아무도 무시하지 못한다”고 말한 게 계기가 됐다. 번듯하게 박사가 돼 일만 시키는 부모에게 앙갚음하고 싶었다.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힘들 땐 두 가지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하나는 자신같이 불쌍한 딸들을 구하는 꿈, 또 하나는 공부를 포기하면 “제까짓 게 그럼 그렇지”하며 남들이 비웃는 상상이었다. 서씨는 이를 당근 및 채찍형 상상이라 표현했다.
그는 제천여중·풍문여고를 우등으로 졸업했지만 대학은 원서도 못 냈다. 그 후 안 해본 일이 없다. 가발공장 직공, 골프장 식당종업원, 회사 경리…. 23세 때 부잣집 아들을 사랑했고, 실연의 아픔을 맛보았다. 미국행을 결심했다.
미국 생활은 험난했다. 첫번째 이혼을 결심한 뒤 미군이 됐다. 이제 박사의 꿈은 잊혀지는 듯 했다. 그런데 42세 되던 해 ‘서 대위’에게 절호의 기회가 왔다. 동북아 지역전문가로 뽑혀 대학원에 갈 수 있게 됐다.
대학원은 하버드를 택했다. ‘하버드 졸업장이면 아무도 무시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5시간 이상 잔 적이 없다. 무조건 하루 200쪽 이상을 목표로 반복해 암기했다. 그 후 박사과정 대상자로 뽑혀 58세의 늦깎이로 박사를 따냈다. 그는 “C형 간염에 걸려 생사의 기로에 섰지만 ‘금의환향’이라는 당근형 상상으로 버텼다”고 회고했다.
서씨는 딸 조성아(32·미군 대위)씨와 하버드 동문이다. 군 생활을 하면서 한국·독일·일본 등 많은 국가를 떠돌며 딸을 하버드대생으로 만든 비결은 뭘까. “호기심을 자극하라.”
해외 파견 근무 때 딸을 국제 학교에 보내지 않고 꼭 현지 학교에 보냈다. 여러 문화에 관심을 갖게하기 위함이다. 딸은 처음에 항상 꼴찌였다. 서씨는 “좌절을 맛봐야 성적이 오르는 희열도 느낄 수 있고, 더 열심히 하려고 애쓴다”고 했다.
10여년전부터 ‘희망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는 서씨는 딸 앞에선 항상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어렸을 때 집안 곳곳에 외국어 만화책들을 깔아놔 호기심을 끌어냈다. 대학원 다닐땐 도서관에 데려가 함께 공부했다. “ 한번도 ‘공부하라’고 다그친 적은 없다. 아이가 항상 책과 공부하는 분위기에 노출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을 뿐.”
프리미엄 최석호 기자
사진= 프리미엄 최명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