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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칼럼>관철동시대 62.사제 도전27번기 2.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0면

한국바둑이 세계4대기전을 휩쓴 영광의 93년,이 해의 한국최고기사는 누구냐.
타이틀수.승률등에서 이창호는 단연 발군이었으나 MVP는 유창혁에게 돌아갔다.기자단의 투표결과 유창혁 10표,이창호 6표,서봉수 1표.
기자들은 후지쓰배를 따내 한국의 그랜드슬램을 완성하고 랭킹1위 왕위타이틀을 고수했으니 MVP 자격이 충분하다고 했다.
이면에는 27세의 패기넘치는 청년 유창혁의 대중적 인기가 한몫을 했다.
유창혁의 공격바둑은 누가 봐도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이창호 지지자들은 불만이 많았다.그들은 가장 센 사람이 최고기사지 인기 높은 사람이 최고기사냐고 언성을 높였다.
92년 MVP선정에서도 이창호는 서봉수에게 밀렸다.왜 이런 일이 잇따라 벌어졌을까.진짜 이유는 이창호가 너무 강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기자들은 서봉수나 유창혁이 MVP가 될 기회는 이번이 마지막아니냐 하는 예감에 젖어있었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18세의 이창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살그머니 웃고 돌아서서는 스승 조훈현과의 격전장으로 걸어갔다.전초전이라 할 93년11월의 배달왕전에서 이창호는 曺9단을3대2로 꺾고 우승했다.
사제도전27번기의 제1라운드는 94년1월에 벌어진 대구의 대왕전.이 대회에서 조훈현은 예상을 뒤엎고 3대0 스트레이트로 이창호를 꺾었다.『이상하다』고 관철동 사람들은 말했다.『작은 타이틀은 선생한테 헌납하는 건가.』 농담이지만 미묘한 뉘앙스가담겨있었다.팬들로부터 『혹시 져준것 아니냐』하는 문의가 쇄도했다.프로세계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이창호는 과도한 대국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는 그럴싸한 해설이 소문을 키웠다.
곧이어 벌어진 기성전에서는 이창호가 조훈현을 4대0으로 일축했다.이 결과가 또 루머를 확대시켰다.
『그것 봐라.실력은 충분하잖아.큰 기전은 이기고 작은 기전은헌상한 거야.』 2월에 이창호는 조훈현의 「패왕」에 도전해 3대1로 타이틀을 탈취했다.3월엔 부산의 최고위전에서 맞붙어 이창호가 또 3대0으로 타이틀을 가져갔다.4월에는 조훈현의 마지막 중앙타이틀이었던 기왕마저 3대0으로 접수해 버렸다.曺9단에게 가장 작은 대왕 하나를 넘겨주고 이창호는 나머지를 모두 빼앗아갔다.무관은 겨우 면했으나 曺9단의 모습은 처량했다.사제도전27번기의 총전적은 이창호의 13승4패.조훈현은 일패도지했고끝내 중앙무대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이창호가 제아무리 강하다지만 항시 3,4개의 타이틀을 유지해온 曺9단으로선 이것이 생애 최대의 패배였고 난생 처음 맛보는쓴잔이었다.유일한 타이틀 「대왕」의 이름이 오히려 더욱 처량한느낌을 주었다.
불멸의 바둑황제에게 남겨진 대왕이란 이름.그 이름이 마치 허수아비황제요,이빨빠진 호랑이같은 느낌마저 주었던 것이다.
관철동의 철없는 입방아들은 다시 소곤거렸다.『대왕전은 아무래도 고의였던 것같아.』 프로들은 이 어이없는 풍문에 쓴 웃음을지었다.曺9단이 들었다면 울고 싶을 얘기였다.
93년과 94년에 걸친 긴 겨울동안 거함 조훈현은 이렇게 침몰했고 무적의 이창호는 13관왕에 올라 확실한 1인자로 자리를굳혔다. 『누가 MVP인가 다시 봐주십시오.』 이창호는 이렇게말하는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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