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천 마디 말도 이 한 컷만 하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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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형근씨는 여고생 이미지에서 우리의 욕망을 보고(사진위), 박영무씨는 한국인의 슬픔을 잡아내며(가운데), 김명철씨는 역사의 뒤안길에 피어나는 삶을 응시한다.

손바닥 안에 든 휴대전화 하나로 사진을 쏘고 영상을 날리는 시대에 이미지는 날로 힘이 세진다. 인류 문명 전수의 가장 큰 무기였던 '읽기'는 '보기'에 슬슬 자리를 내주는 것처럼 보인다. 단어에 대한 불신이 커지는 오늘날 '보기의 문제'는 세상을 이해하는 기본이 되었다.

이미지는 이제 한 사회가 규정한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 텔레비전이 초 단위로 쏟아내는 이미지나 신문.잡지가 박아낸 사진 속에서 꿈틀거리는'보기의 선입관'이 우리 몸과 마음을 단단하게 조인다.

사진작가 오형근(41.계원조형예술대 예술학과 교수)씨는 일찌감치 이미지에 깃든 힘의 논리를 알아챘다. 1999년 그가 열었던 '아줌마'전은 우리 사회가 아줌마라고 규정하는 또래 여성군이 품은 착잡한 이야기를 강력한 흑백사진으로 풀어냈다. 그는 아줌마라는 단어가 묶을 수 있는 이미지에서 한국 사회의 권력을 보았다. 아줌마 사진이 내뿜는 슬프고 고립된 이미지는 그들이 기대고 있는 아저씨의 계층에 따라, 또는 아저씨의 욕망에 따라 각양각색을 이뤘다.

오씨가 5월 2일까지 서울 세종로 일민미술관에서 열고 있는 '소녀 연기(演技)'는 '아줌마'전을 잇는 한국 사회 보기전이다. 연기자를 꿈꾸는 십대 여자 고등학생들을 등장시켜 우리 사회가 여고생에 대해 부여한, 또는 억압한 이미지를 유형화했다. '이런 이미지가 바로 소녀야'라고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각종 대중매체의 소녀 규정은 교복을 차려입은 그들을 정렬한 군인들처럼 비슷한 꼴로 만든다. 그것은 한국 사회에서 소녀로 살아가기 위한 일종의 이미지 공식이다. '여고생은 이래야 해'라는 우리들의 욕망이 빚어낸 연기다. 따라서 그가 찍은 아줌마나 소녀 사진 모음은 '한국인 도감(圖鑑)'이라 할 수 있다. 02-2020-2055.

오형근씨보다 한 두 세대 위인 김명철(1918~78)씨와 박영무(59)씨가 찍은 사진 속에서 한국인의 이미지는 세월 속에 풍화된 듯 아련해진다.

4월 7일부터 20일까지 서울 관훈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시간의 풍경-타임 인 카메라(Time in Camera)'전은 전쟁이 휩쓸고간 이 땅에 다시 불어닥친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사라져간 익명의 사람들을 보여준다. 손바닥만한 담뱃가게를 지키는 중년 사내나 송도 언저리 숲을 걸어가는 기웃한 어깨의 사내 모두 수천 마디 말이 담을 수 없는 시대의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다. 02-736-1020.

31일부터 4월 27일까지 서울 관훈동 대안공간 풀에서 4주 동안 4개의 전시로 이어지는 젊은 사진가 릴레이전'도시에 머문 시선'은 젊은 세대 사진작가들이 살핀 도시 이미지다. 여관.지하철.포르노그래피 등 20~30대 사진작가가 짚어낸 한국 도시의 이미지는 한국인을 탐색하는 하나의 도구가 된다. 02-735-4805.

이미지를 볼 줄 모르는 자는 문맹자보다 더 살기 힘든 시대가 왔다. 사진 평론을 주로 하는 이영준(43.계원조형예술대 사진예술학과)교수는 자신을 일찌감치'이미지 비평가'라 불렀다. 그가 펴낸 '이미지 비평'(눈빛)은 깻잎머리에서 인공위성까지 "이미지가 나의 망막에 꽂히는 그 순간의 섬광을 설명한" 이상한 책이다.

그는 "도서관에 꽂을 수 없는" 이 책에서 몸에 깊이 각인돼 있는'보기의 문제'를 정확하게 설명한다. 그는 "읽지 말고 보라"고 말한다. 오형근씨가 찍은 아줌마나 여고생처럼 오염된 이미지를 걷어내고 솔직하고 다르게 보기를 권한다. 보는 이 눈동자 숫자만큼 다른 이미지들을 보고 그 차이에서 낯선 이야기를 빚어낸다면 세상은 얼마나 더 즐거운 이미지 천국이 될 것인가, 라고 이씨는 말한다. "익숙함의 파괴, (권력화한) 지식의 파괴, (기성질서에 눌린) 세계의 파괴"가 이미지 시대에 그가 제시한 사진 보기다.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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