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기업인처리,해외波長 고려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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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노태우(盧泰愚)씨 사건은 새삼 이 나라 정치권력의 위력을 실감나게 한다.부정축재는 자릿세나 뇌물을 요구하는 정치권력이 있기 때문에 일어나게 된다.이번에도 예외가 아니다.
돈을 준 기업인들이 줄줄이 소환되면서 이제는 검찰이 기업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이유가 어떠하든 기업인들이 돈을 주었다는 사실은 완전한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은 기업인들 이 스스로 돈을 주지 말았어야 옳지 않느냐고 주장한다.그들의 말에는 일면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 땅에서 구멍가게든 중소기업이든지 간에 사업이란 것을 한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쉽게 기업인들을 나무랄 수가 없다.왜냐하면 정부와 기업의 관계는 대단히 불평등한 관계이기 때문이다.각종 인허가권으로부터 관치금융에 이르기까지 정부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정치권력은 마음 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기업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다.이 땅에서 사업을 하려면 고분고분원하는 것을 갖다바치든지 아니면 이 땅을 떠나든지 둘중 하나를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기업인들 이 처한 딱한 사정이다.
지난 50여년동안 한국기업이 걸어온 길을 보면,정치권력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던 기업들은 대부분 망할 수밖에 없었다.삼호그룹.제세그룹.국제그룹등 수없이 많은 기업들이 정치권력의 눈밖에 나서 몰락했다.자칫 위로부터 미움이라 도 받는 날이면 정상적인 사업활동을 할 수 없는 것이 이제까지의 상황이었다. 정치권력과 기업이 대등한 관계에 있다면 부정부패에 대해서도 두 집단이 똑같이 비난받아야 한다.그러나 한쪽은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고,다른 한쪽은 그들의 눈치를 보면서 사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중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인지곰곰이 되물어 보아야 한다.
지난 6공화국 시절,대기업들,특히 재벌기업에는 대단히 피곤한시절이었다.경제에 대해 별다른 소신을 갖지 못한 대통령과 그 주위를 둘러싼 강성인물들이 줄기차게 현실과 동떨어진 재벌정책을추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1991년에는 국제경쟁력 하락의 주범이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이라는 기묘한 논리를 앞세워 업종 전문화정책이란 것을 실시했다.게다가 부동산 투기의 주범이 재벌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기업인들을 마치 죄인 마냥 기자회견장으로 몰아 넣 었다.그 이후에도 신산업정책이라는 해괴한 정책으로 기업들을 괴롭혔다.
재벌을 속죄양으로 삼는 마녀사냥은 6공화국 전 기간을 통해서계속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한쪽으로는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의 각종 정책으로 기업인들을 윽박지르면서,다른 한쪽으로는 끊임없이 돈을 요구하는 상황이 일어났다.
본래 기업가는 착하거나 악한 사람들이 아니다.그저 이윤을 남길 수 있다면 혼신의 힘을 다해 뛰는 사람들이다.그들이 질좋고값싼 물건을 만드는 것과 같은 생산적인 활동에 노력을 들이느냐,아니면 로비나 뇌물과 같은 파괴적인 활동에 자 원을 쏟느냐는한 나라의 제도와 관행에 달려있다.마치 신호등에 따라 자동차를운전하듯이,기업가들 역시 제도라는 인센티브 구조에 따라 열심히살아갈 뿐이다.그러나 잘못된 신호등 밑에서 이상적인 운전자를 기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동안 정치권력이 기업에 어떻게 군림해 왔는가라는 사실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기업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사법처리가 가져올 국내외적인파장도 함께 고려해 관련기업인들에 대해 보다 사려깊은 접근이 필요하다.무엇보다도 검찰과 사법부가 국민감정이나 정서보다는 명백한 뇌물공여와 일상적인 자릿세를 구분하는 사려 분별과 지혜를갖고 기업인 문제 처리에 임해 주었으면 한다.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경제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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