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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週를열며>地獄을 극락으로 바꾸려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지장경(地藏經)』은 가장 혹독한 벌을 주는 곳으로 무간지옥(無間地獄)을 꼽는다.몸이나 마음,시간이나 공간을 막론하고 조금이라도 틈이 없이 고통을 겪게 한다는 뜻에서 「무간(無間)」이라는 말을 쓴다.이 지옥에서는 죄인이 날마다 만 번 죽고,만번 살아난다.고통을 견디다 못해 까무러쳐서 죽게 하고,그냥 죽어버리면 계속 고통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다시 살아나게 한다. 나는 『지장경』을 읽을 때마다 우리의 현실속에서 무간지옥의예는 어떤 것일까를 생각해 보곤 한다.애인.자식.재산.명예.건강 같은 것을 크게 잃으면 무척 괴로우리라고 짐작하기는 하지만,그래도 그 고통은 잠시라도 편안한 틈을 줄 것이 기 때문에 무간지옥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이번에 터진 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 비자금사건을 통해무간지옥의 예를 보는 것같다.
국민 가운데는 아직도 하늘이 임금을 낸다고 믿는 이들이 많다.그 국민이 너 나할 것 없이 盧전대통령에게 돌을 던지고 침을뱉는다.그 자신뿐만 아니라 부인.자식.사돈,그리고 그와 인연이있던 이들이 매스컴의 플래시 앞에서 벌거벗겨진 채 망신당하고 어떤 인연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그를 멀리하는 듯한 괴로운 제스처를 쓰기도 한다.그에 대한 온갖 비난.야유.탄식등을 보면서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盧전대통령은 지금 죽고 싶을 거야.』 우리의 짐작은 맞다.보도에 의하면 盧전대통령은 『영원히깨어나지 않는 약은 없나』라는 독백을 토했다고 한다.그는 지금무간지옥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그렇다면 지금의 이 상황,이 시점에서 盧전대통령이 지옥을 벗어나 극락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석가의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무아(無我),즉 「나」를 지우라고 한다.그런데 그냥 나를 지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무대를 잘 꾸미기 위해 그 지워버린 자신을 써야 한다.
훌륭한 의사를 만들려면 의대생들에게 사람의 몸을 직접 해부해볼수 있도록 시체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어린 학생들에게 곤충채집 공부를 시킬 때에는 죽은 곤충의 시체들이 있어야 한다.국민에게 무한한 물욕을 가진 인간의 실상을 보여주고 참다운 삶의 가치관을 공부시키기 위해서는 과욕의 극치와 파멸을 함께 보여주는 생생한 실례(實例)가 필요하다.盧전대통령이 자발적으로 그 물질.도덕 교육을 위한 재료로서의 시체가 되어 주는 것이다.
우리가 잘못된 과거와 확실하게 단절하고 새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아무리 아프더라도 盧전대통령과 같은 희생물을 사용할 수밖에없다.盧전대통령이 기쁜 마음으로 그 제물(祭物)이 되어 나라와민족을 위해 공헌하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금강경』을 보면 인생무상(人生無常)을 가장 깊이 통달했다고하는 수보리가 공(空)에 대해 석가에게 묻고 또 묻는다.자신이몰라서가 아니다.무상(無常)을 모르는 이들에게 석가의 가르침을들려주기 위해 짐짓 모르는척 하는 것이다.盧 전대통령이 「나」를 지우는 순간 욕심쟁이는 단번에 예수.공자.석가의 가르침을 청하는 청법자(請法者)가 된다.짐짓 우치(愚癡)한 척하는 현자(賢者)가 되고,짐짓 도둑인 척하는 시주(施主)가 된다.지옥은순식간에 극락이 된다.지옥과 극 락이 같은 장소에 있다는 것을깨닫게 된다.
우리는 『사돈 남말하네』라든지 『너는 어떻고』라는 말의 뜻을알고 있다.그렇다면 『盧전대통령의 요소가 나에게는 없는가』라는물음을 내야 한다.盧전대통령만 지옥을 극락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우리에게 있는 지옥도 극락으로 만 들어야 한다.盧전대통령의 드러난 과욕으로 숨겨진 자신의 과욕을 합리화하려 한다면 우리는 잠재적 지옥에 사는 셈이 된다.
(청계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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