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는 지금 ‘따뜻한 IT 혁명’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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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싱키 영어 유치원 ‘플레이 & 런’에서 교사<左>가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카메라폰으로 촬영하고 있다. 이 사진은 실시간으로 유치원 홈페이지에 올라가 부모들이 보며 댓글을 달거나 사진을 내려받을 수 있다. [헬싱키=신예리 기자]

핀란드의 헬싱키 인근 도시 에스포에 사는 80대 중반의 타티아나 트라스(여). 몇 년 전부터 거동이 불편해진 그는 일주일에 몇 차례씩 TV 앞에 앉아 처지가 비슷한 다른 노인들, 의료·복지를 전공한 자원봉사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게 큰 즐거움이다. “힘들게 외출하지 않고도 아픈 증세를 물어보거나 생활 속 소소한 고민거리들을 의논할 수 있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는 것이다.

트라스에게 큰 힘이 돼 주는 이 서비스는 에스포시와 라우레아 대학, 여러 정보기술(IT) 업체가 공동 개발해 시범 운영 중인 ‘케어링 TV’다. 핀란드는 85세 이상이 전체 인구의 1.8%(2007년)이고, 유럽 국가 중 고령화 속도가 가장 빠르다. 이에 따라 독거 노인 또는 질환으로 입원했다 귀가해 자립하려는 이들을 제대로 보살피기 위한 서비스의 필요성이 커지자 지자체와 학계·업계가 함께 나선 것이다.

소비자인 노인들도 힘을 보태고 있다. 현재 120여 명이 내년도 시판에 앞서 서비스의 질을 높이는 막바지 작업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라우레아대에서 ‘케어링 TV’ 개발을 담당하는 카타리나 라이 박사는 “노인들이 소비자 입장에서 이걸 보태라거나 저걸 고쳐 달라는 등 요구사항을 하도 많이 내놔 진땀을 빼고 있다”며 웃었다.

‘케어링 TV’는 IT 강국 핀란드가 지난해 11월부터 의욕적으로 추진 중인 ‘헬싱키 리빙 랩(Living Lab)’의 대표적 사례다. 중앙 및 지자체 정부·대학·업계·소비자가 국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꼭 필요한 IT 서비스 및 제품을 공동 개발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다. 닫힌 실험실에서가 아니라 소비자들이 각자의 집과 직장에서 실제로 사용하면서 품질을 개선해 나간다는 게 특징이다.

‘헬싱키 리빙 랩’의 총괄 책임자인 잔느 오라바는 “나와 내 이웃이 직접 쓸 제품·서비스의 질을 높인다는 생각으로 현재 수도권 일대 주민 5000여 명이 갖가지 실험에 동참하고 있다”며 “이 과정에서 실용성이 눈에 띄게 좋아진다”고 말했다. 예컨대 ‘케어링 TV’의 경우 TV에 터치패드를 부착해 노인들이 손가락만 갖다 대면 작동되도록 쓰기 편하게 만들어졌다.

맞벌이 부부와 유치원에 다니는 자녀 간 소통을 돕기 위한 ‘포토 다이어리’ 서비스도 쓰기 편함에 중점을 뒀다. 교사들이 카메라가 장착된 휴대전화로 아이들의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기만 하면 곧장 유치원의 홈페이지에 올라간다. 부모들은 실시간으로 이를 보며 댓글을 달거나 사진을 내려받을 수 있다. 지난해 말부터 이 서비스를 도입한 헬싱키 내 영어 유치원 ‘플레이 & 런’의 매니저 조너선 스콧은 “바쁜 교사들이 사진을 일일이 저장하고 홈페이지를 꾸려 나가기 힘들기 때문에 이 서비스의 반응이 매우 좋다”고 말했다. 부모들에게 개별적인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부여해 아이들 사진이 외부에 유출되지 않도록 보안성을 높인 것도 장점이다. 이 서비스는 영국·미국·싱가포르 등에도 수출돼 약 170개 유치원에서 이용하고 있다.

‘헬싱키 리빙 랩’에선 이 밖에도 보행자·대중교통 이용자·승용차 운전자에게 도로·기상·주차·여행과 관련된 맞춤형 정보를 제공하는 ‘인텔리전트 교통 시스템(HITS)’ 등 다양한 서비스를 개발 중이다.

헬싱키=신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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