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재 기자의 웰컴 투 풋 볼 <49> 벤치에 못 앉은 양복 차림 박지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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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인천공항에서 파리 드골공항까지 꼭 12시간이 걸렸다. 거기서 다시 비행기로 4시간을 날아 모스크바에 내렸다.

호텔에 도착한 시각은 21일 새벽 3시.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의 날이 이미 밝아 있었다. 루즈니키 스타디움은 호텔에서 빤히 내려다보였지만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1956년 세운 이 경기장의 처음 이름은 센트럴 레닌 스타디움. 원형의 경기장을 등지고 거대한 레닌 동상이 서 있다. 그 뒤로 결승전에서 맞붙을 맨유와 첼시의 대형 로고가 걸려 있었다. 경기장 2층 미디어센터의 TV 모니터에는 경기 실황을 중계할 영국 스카이 TV가 화면을 점검하는 장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킥오프 5시간 전, 갑자기 TV 모니터에 맨유의 선발 포진도가 떴다. 왼쪽 미드필더 자리에 ‘PARK’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후다닥 카메라를 꺼내 화면을 찍었다. 서울 본사에 연락해 온라인(joins.com)으로 기사와 사진을 처리했다. 물론 ‘화면 점검용’이라는 설명을 했지만 내심 이 멤버가 그대로 나오기를 바랐다.

경기 1시간 전 엔트리가 발표됐다. 박지성은 없었다. 대신 오언 하그리브스가 나왔다. 나머지 10명은 4시간 전 화면과 똑같았다. 포지션도 호날두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간 것만 달랐다. 스카이 TV도 박지성의 선발 출장을 예상했던 것이다.

킥오프 전 화려한 식전행사가 펼쳐졌다. 맨유 벤치 쪽에 박지성이 보였다. 그는 양복을 입고 있었다. 벤치에도 못 앉게 돼 관중석으로 올라가던 그는 양손을 바지 호주머니에 찌르고 우두커니 그라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뛰고 싶었을까.

경기 내내 하그리브스에게 자꾸 시선이 갔다. ‘지성이 대신 나온 네가 얼마나 잘 뛰는지 보자’라는 심정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그는 박지성만큼 에너지가 넘치지도, 헌신적이지도 않았다. 위협적인 패스나 슈팅도 없었다. 좋게 말해 무난했고, 나쁘게 평한다면 존재감이 없었다. 그런데 영국 스카이스포츠는 평점 8점에다 ‘경기를 지배했다’는 찬사까지 덧붙였다. 맙소사.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경기 막판 장대비로 바뀌었다. 시상식이 열리는 동안 박지성은 비에 흠뻑 젖은 양복을 입고 있다가 위에 흰색 트레이닝복을 걸쳤다. 경기가 끝나면 선수들은 기자들이 모여 있는 믹스트존을 통과해야 한다. 30분쯤 기다리자 새 양복으로 갈아입은 박지성(사진)이 나왔다. 소감을 묻자 “기쁘죠”라고 답했다. 하나도 안 기쁜 표정이었다. 그는 “뭐∼”로 시작해 “∼때문에”로 연결되는 특유의 건조한 화법으로 말했다. 내가 못 뛰었지만 팀이 우승해서 기쁘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더 잘하겠다고.

맨유는 우리의 영웅을 양복을 입은 채 그라운드에서 찬비를 맞게 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새벽 3시45분을 기다리던 한국 축구팬에게 당혹감과 배신감을 안겼다. 다시 파리를 거쳐 서울로 돌아오면서 자문자답했다. 맨유는 우리 팀인가. 아니다. 퍼거슨은 우리 편 감독인가.아니다. 맨유는 최고의 팀인가. 맞다. 그렇다면 맨유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정영재 기자·축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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