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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훈범 시시각각

소인과 군자는 한 끗 차라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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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참 골고루 한다. 어쩌면 이렇게 국민 염장 지르는 짓거리만 골라서 할 수 있는지 재주도 용하다. 이 나라 장관 나리들 말이다. 흘리는 사람이 있으면 주워 담는 사람도 있어야 할 텐데 너도나도 질러대기만 하고 수습은 나 몰라라다. 그러니 민심이 떠나는 게 당연한데 이런 사람들하고 먼 길 가겠다고 작정한 우리 대통령이 딱할 따름이다. 이게 모두 ‘친구 인사’가 부른 결과니 할 말은 없을 터다. 그래도 어쩌다 소 뒷걸음에 쥐 잡는 도우미라도 하나 나와줄 법도 한데 도처에 ‘X맨’뿐이니 이보다 가혹한 인과응보가 없다.

문제는 그렇게 터지고 또 터졌어도 여전히 지뢰밭이라는 거다. 사고 치는 상공(相公)들을 지켜보니 그 사고가 단순한 실수가 아닌 것 같아 하는 소리다. 언제 터질지 모를 뇌관들이 도처에 묻혀 있다는 거다. “땅을 사랑했을 뿐”이라거나 “암이 아니어서 오피스텔을 사줬다”는 식의 이 정부 고소영·강부자들의 정신세계는 이미 경험한 적 있어 새삼스러울 게 없지만 그 독특한 상상력이 어쩌면 그렇게 다양하게 확장될 수 있는지 놀랍기만 하다.

 새로 활약한 인물은 나라의 백년대계를 책임진 교육과학기술부 수장이다. 모교를 방문해서 “나, 이만큼 출세했노라” 폼 잡을 수 있도록 격려금 봉투를 내놓으라고 장려했다는 거다. 심지어 자녀 학교까지 갔다는 거다. 나랏돈으로 장관은 2000만원, 차관은 1000만원, 실·국장들은 500만원짜리 봉투를 만들었다는 것도 기가 막히는데, 해명이라고 내놓는 소리가 명창이다. “관행이었지만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유감”이라는 거다. 난 정말 이웃나라 정부가 흔히 써먹는 외교 수사(修辭)인 줄만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열 받은 국민 앞에 그런 시건방을 떨 수 있겠느냔 말이다. 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고 있다는 얘기다. 장관 사퇴 요구까지 나올 만큼 분위기가 험악해지니까 그제야 대국민 사과를 하지만 그 사이 등진 민심은 사과를 받아들일 기분이 아니다. 그렇게 크고 단단해진 분노는 곧 그의 보스를 향한다. 그런 관행 다 없애겠다고 동분서주하는 대통령 말이다.

청문회 때 목격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의 자유정신은 수십억원의 예산 지원을 대가로 농촌 지자체장들한테서 해임 건의 반대 서명을 받았다는 의혹으로까지 날아간다. 자신의 해임을 막는 데 나랏돈을 좀 써도 결국은 농촌 지원하는 거 아니냐는 식이다. 체면치레 위해 곳간 문을 열어도 결국 교육투자란 논리처럼 말이다. 그에 비하면 “소도 생명인데 10년은 살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보건복지가족부 장관과 “농촌 땅 사주는 도시 사람들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는 행정안전부 장관은 낭만적 정신의 소유자일 뿐이다. 장관들이 분별없는 낭만을 튕길 때 근근이 붙어 있던 대통령과 국민 사이 믿음의 줄이 우수수 떨어져 나갔지만 말이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은 이런 ‘소인론(小人論)’을 폈다. “예로부터 소인이라 하는 자는 학문을 빙자하며, 행동이 풍속을 속이기 족했고 재주는 변고에 대응하기 족했다. 그런 자가 벼슬에 있으면 사람들이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므로 제 하고 싶은 대로 행했다. 그들이 군자와 다른 점은 오직 공(公)과 사(私), 한 터럭만큼의 차이뿐인데도 그 화가 매우 참혹했다. 하물며 재능과 학식이 없으면서 오직 좋은 관직만 기를 쓰고 탐내며 구차하게 사는 자가 조정에 가득하다면 그 화가 어떠하겠는가.”

내 귀에는 지금 우리 모습을 두고 하는 얘기처럼 들린다. 우리 상공들이 소인배일 리 없는데 그렇다. 허균의 지적처럼 군자와 소인이 한 끗 차이인 까닭이다. 공과 사 어디에 목을 매느냐는 거다. 공사를 처음 구분했다는 한비자는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걸 사라 하고 그와 반대되는 게 공”이라 했다. 여태 자기 몸 보살펴 강부자가 되고 덧대어 재상 자리까지 올랐는데 무슨 바람이 더 있을까. 이제 그 반대되는 일에 그 몸 한번 바쳐보면 어떨는지. 한 끗 차로 소인배가 되면 억울하지 않겠나 말이다.

이훈범 정치부문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