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금융인의 원초적 죄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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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은행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업무는 예금과 대출인데,이를 수신(受信)과 여신(與信)이라고도 부른다.물론 여기에서 신(信)은 「빌려준다」는 뜻을 가진 「신용」을 의미하지만,그것은 고객과 은행 사이에 믿음의 중요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사실 은행과 고객 사이의 거래는 철저하게 신용,즉 서로의 믿음 위에 기초하고 있다.특히 일반 제조기업의 존립이 자본금으로뒷받침되는 것과 달리 은행의 존립은 공신력 위에 기초한다.그래서 은행의 자본금은 전체 자산의 5% 정도고 많아 도 10%를넘지 않는다.이처럼 은행은 공신력 위에 세워진 건물과 같다.
최근 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의 비자금 사건과 연루된 은행들의과거행태는 고객의 신뢰를 망각한,참으로 개탄해 마지 않을 일이다.왜냐하면 어느 정도까지가 순전히 자의였는지는 몰라도 비자금처리과정에서 은행측이 수표 바꿔치기 수법으로 돈세탁을 도와주고,심지어 타인명의를 도용(盜用)까지 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어 조직적으로 돈세탁을 자행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돈세탁을 막아야 할 최전방 파수꾼인 은행이 가장 기피해야 할은행원의 원초적 죄악인 돈세탁에 그것도 자기도 모르게 연루된 것이 아니라 앞장서서 관여한 듯한 행태는 국민의 신뢰를 악용한대리인의 「도덕성 파탄(moral hazard )」행위다.당시의 시대적 불가피성을 십분 이해한다고 해도 그러한 원초적 죄악은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금융인은 크게 반성하고 다짐하는 바가 있어야 하겠다.아울러 대리인의 도덕성 파탄 문제는 은행의 일 처리과정이 투명하지 못한데서 발생하므로 금융인의 행동에 대한 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도 마련해야 할 것이다.도대체 돈세탁과 관련해 명망있는 은행장이 검찰의 조사를 받았던 사례는희귀한 일이다.
50대 재벌기업 대부분이 검찰에 소환되고 있는 것을 보면,대부분의 은행들이 이번 전직 대통령 비자금 파문과 직.간접으로 연루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 같다.이때 유의해야 할 것은 이번 비자금 파문에서 비록 금융인들이 원초적 죄악을 범했다고 해도 전체 사건 맥락에서 보면 주역보다는 보조역이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될 것이다.그러므로 사법처리의 흐름도 부패의 큰뿌 리를 절단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일벌백계(一罰百戒)의 원칙이 적용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금융시장의 개방화와 국제화 폭이 점점 확대돼 가고 있다.이는 금융시장의 국경 장벽을 제거하게 될 것이고,그것은 마약자금의 세탁등 우리나라 금융기관이 국제 범죄조직의 돈세탁 시도에 노출될 것임을 의미한다.아울러 금융국제화에 따라 국내 금융관행도 국제 관행에 맞추어 선진화돼야 하겠다.특히 상호 호혜주의 원칙이 점차 보편화되고 있는 지금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들이 돈세탁 방지법을 만들어 시행하고 있음에 유의해 우리도 돈세탁 방지법 또는 그러한 기능을 수행 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국내 금융기관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
이번 비자금 파문과 연루된 금융인의 행태를 보면서,우리는 그들에게 「당신네 잘못」이라며 그들만 단죄하느라 목청을 높일 것인지도 생각해 봐야 하겠다.왜냐하면 이번 비자금 파문은 전직 대통령 한사람과 일부 재벌 총수들의 비리및 정경유 착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각계 각층의 총체적 비리와 부패문제의 한 단면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번 비자금 파문에 분노하고 특히 금융인들에게 정당하게 행동하도록 요구하는 만큼,비록 크든 작든 간에 우리 모두 자신의 비리에도 분노하고,정당하게 행동하도록 자신에게 요구해야 마땅한것은 아닌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돼야 하겠다.
( 한양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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