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74. 도쿄 국제가요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1974년 도쿄 국제가요제에 출전한 필자(오른쪽에서 둘째).

가수는 참으로 축복받은 직업이다. 빈털터리가 되더라도 목소리 하나로 다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다시 생활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이미 계약한 방송출연과 공연만 아니었다면 잠시 우리나라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던 중 길옥윤 선생이 ‘사랑은 영원히’라는 신곡을 만들었다며 도쿄 국제가요제에 함께 나가자고 했다. 그러면서 다시 일본에서 활동해보라고 했다. 전폭적으로 도와주겠다고까지 했다. 처음 일본에 갔을 때 내 매니지먼트를 맡았던 MK프로덕션 고바야시 사장도 마찬가지였다. 이혼한 나를 오해하고, 진실보다 소문을 믿으며 나를 비난했던 우리나라 사람들에 대한 실망이 너무 커 아예 일본으로 귀화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일본에서 보란 듯이 성공해서 엔카의 여왕 미소라 히바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팝의 여왕이 되면 나를 비난했던 사람들도 후회하겠지?”

예나 지금이나 일본이라면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정서를 가진 한국인들에게 ‘패티 김, 일본인으로 귀화해 일본 팝계의 여왕 자리에 올라’라는 뉴스로 복수해볼까 하는 마음이었다. 이제는 웃으며 얘기할 수 있지만 그때는 정말 절박한 심정이었다.

‘사랑은 영원히’가 기대처럼 금상을 받았더라면 홧김에 정말 일본으로 귀화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도 내 운명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도쿄가요제는 가수보다 작곡가에 더 비중을 두는 가요제였다. ‘사랑은 영원히’는 후보곡들 중 가장 뛰어나고 아름다운 곡이었다. 당시 일본 가요계 사람들도 ‘사랑은 영원히’가 금상을 탈 것이라는 걸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다들 그렇게 장담했기 때문에 나도 당연히 금상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세계무대에서 상품성이 있는 미국 흑인 여성그룹에게 금상이 수여됐다. 은상은 당시 인기 있었던 일본 남녀 가수가 각각 받았다. ‘사랑은 영원히’는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동상을 수상했다. 국제가요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성보다 상품성을 먼저 따지는 상업적 놀음에 나는 크게 실망했다. 진지하게 고려했던 일본 활동 재개 구상도 금세 지워버렸다. 그렇다고 우리나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나는 일단 형제·자매들이 살고 있는 미국·영국·스페인을 돌며 여행이나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정아와 함께 도쿄에서 바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때까지 순수한 여행을 목적으로 해외에 나간 적이 거의 없었다. “오래 못 만나고 지낸 형제들도 만나고 정아와 단 둘이 여행하며 한동안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아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너무 지치고 피곤한 나에게 난생 처음 휴가를 주자는 생각이었다.

패티 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