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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의 주말 산책]내 푸른 머리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63호 39면

발단은 나날이 기록을 경신하는 내 몸무게였다. 한계다 싶었던 체중을 몇 고비 넘으니 괜한 체중계에 정나미가 떨어져 거들떠보지 않은 지도 꽤 됐다. 그러던 차에 수시로 들락거리는 인터넷 고양이 카페에 다이어트 약을 같이 구매하자는 글이 올랐다. 하루에 한 알씩 두 달 복용했는데, 몸무게가 8㎏ 빠졌다는 것이다.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말이다! 자기는 한 통만 더 복용할 생각인데, 두 통을 주문하면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으니 같이 살 사람 없느냐는 것이다. 리플들을 보니 그 약은 착실한 다이어트 약으로 이미 명성이 자자한 모양이었다.

“저요!” 냉큼 손을 들고 싶었지만 그이는 지방에 사는 사람이었다. 우송료를 따로 들이느니 나 혼자 직접 구매하는 게 나을 성싶었다. ‘이제 내 힘만으로 도저히 안 돼. 한 달에 4㎏! 환상적이다! 그걸 종자 체중 삼아 경신하는 거야…’. 나는 꿈에 부풀어 당장 인터넷을 통해 그 약을 취급하는 사이트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 약 한 통과 ‘new’가 빠졌을 뿐 같은 이름인 약 두 통을 주문했다. 효능은 그대론데 가격만 두 곱 비싸진 채 ‘new’가 됐다는 사용 후기를 참조한 선택이었다.

두 달이 다 돼가도록 체중은 전혀 줄지 않았다. 줄기는커녕 어이없게도 2㎏ 더 늘었다. 설명서에 적힌, 당뇨병이나 고혈압이 있는 사람은 먹지 말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감수하면서 꼬박꼬박 먹었거늘! 그러고 보니 약을 복용한 날부터 식욕은 더 왕성해지고 온종일 졸음이 쏟아져 틈만 나면 쓰러져 잤다. 불면증과 식욕 감퇴와 메슥거림 등의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더니 대체 어떻게 된 노릇인가. 내 몸이 이상한 건지 약이 이상한 건지.

‘효과 끝내줘요’ ‘요요 현상, 안구에 쓰나미…’. 리플을 보니 다들 이렇다는데, 요요고 뭐고, 뭐, 1g이나 줄었어야 말이지. 그래도 나는 우직하게 가는 사람. 석 달째에 ‘new’가 붙은 새 약병을 땄다. 그런데 헌 약병을 버리기 전에 살펴보니 유통기한이 지워져 있다. 새 약병은 유통기한도 선명하고 약효도 달랐다. 당장 메슥거리고 어지럽고 식은땀이 나면서 살이 벌벌 떨렸다. 병치고도 중병 증세였다. 인터넷 검색창에 약 이름과 ‘부작용’이란 글자를 쳐봤다. 햐! 그냥 한번 해본 건데 줄줄이 정보들이 올려져 있다. 유독 성분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한 아가씨 글이 인상적이었다. “나한테는 너무 잘해준 선배였는데, 실은 좋지 않은 사람이라는 뒷말을 듣는 기분이에요. 먹어선 안 되는 약이라고 뉴스에도 나왔다죠. 나는 별 부작용 없이 편하게 날씬해졌어요.”

그녀는 20대였다. 그래, 내가 보약을 먹을 나이지 다이어트 약을 먹을 나이가 아니로다. 께름칙해하면서도 거르지 않아 약이 열 알인가 남은 엊그제, 나는 소스라쳤다. 거울에 비친 내 머리칼이 마음에 걸려 안경을 쓰고 다시 보니 흰머리 천지인 것이다. 빠지라는 살은 안 빠지고 머리만 허예졌네! 이삼 일을 한여름 김매듯 흰머리를 뽑아댔더니 머리숱이 반이나 준 듯 헐렁하다. 신경증처럼 자꾸 머리에 손이 가는데, 이제는 정말 흰머리를 뽑을 때가 아닌 것 같다. 숱지던 그 시절 어디로 갔나.

정녕 염색을 해야만 한다면, 검정도 싫고 갈색도 싫다. 노랑도 싫고. 오직 흰머리를 가릴 셈으로 물들이기는 싫도다. 무슨 색으로 할까, 내 인생의 첫 염색. 보라색, 좋다. 녹색도 좋고 연두색도 괜찮아. 벚꽃 분홍, 파랑, 하늘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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