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의 끝? … 너무 섣부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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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호 34면

“금융위기발 경기침체에 이어 인플레이션 리스크까지 커지고 있다. 글로벌 경제는 내년까지 인플레에 시달릴 가능성이 크다.”

폴 베이트먼 JP모건자산운용 회장 인터뷰

미국 JP모건자산운용의 폴 베이트먼(62·사진) 회장이 한국 현지법인의 경영을 살피기 위해 최근 서울을 방문했다. 그는 중앙SUNDAY와 한 단독 인터뷰에서 “아직 세계 경제가 위기의 터널에서 빠져나온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신중론을 피력했다.
베이트먼 회장은 월스트리트의 대표적인 복합금융회사인 JP모건체이스그룹의 경영위원회 핵심 멤버이기도 하다. 그는 3월 JP모건이 경쟁회사인 베어스턴스에 긴급자금을 지원할 때 고비고비마다 최고 의사결정에 참여했다. 그에게서 금융위기와 글로벌 경제, 한국 금융산업의 전망 등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먼저 숨가쁘게 진행된 베어스턴스 구제·인수 과정에 대해 물었다.

“뉴욕 연방준비은행과 긴밀하게 협의해 긴급자금을 중개했지만 빅 브러더(금융시장 맏형) 차원에서 한 일은 아니었다. 우리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우리와 한 몸체였던 모건스탠리가 1930년대 떨어져 나간 후 JP모건의 투자은행 부문 경쟁력이 상대적으로 약했는데, 베어스턴스를 인수해 약점을 보완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다소 퉁명스럽게 들리는 그의 영국식 억양을 타고 나온 말은 너무나 솔직했다. 시장의 안정이나 공익을 내세울 법도 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의 말에서는 미국에 중앙은행이 없던 1907년 JP모건이 위기에 빠진 신탁은행들을 구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 은행이 헐값에 내놓은 철도회사 주식을 대거 사들여 나중에 큰 수익을 챙긴 JP모건 특유의 야수적 본능이 엿보이기도 했다.

그는 “경쟁사들이 상대적으로 수익률이 높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관련 파생상품을 거침없이 사들일 때 우리는 최대한 적게 거래해 자본구조를 건전하게 유지했다”며 “덕분에 베어스턴스를 사들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JP모건의 자산 50억 달러 정도만 서브프라임 사태로 부실화됐다. 400억 달러가 넘는 씨티그룹이나 380억 달러에 이른 메릴린치 등과 견주면 비교적 가벼운 상처로 평가받을 만하다. 베이트먼 회장은 “(주택 거품 당시) 우리도 서브프라임 파생상품의 고수익을 뿌리치기 어려웠다. 하지만 거품이 결국 붕괴할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자본과 자산 구조를 최대한 건전하게 유지하려 애썼다”고 회고했다.

얘기는 자연스럽게 미 금융위기 파장으로 이어졌다. 많은 전문가가 금융위기가 끝났다고 말하고 있는데 실제 그런지 궁금했다. “최근 글로벌 금융시장 상황이 한결 좋아지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서브프라임 사태는 역사적으로 아주 특별한 사건이다. 이런 사건이 발생한 지 1년여 만에 해결됐다고 보는 것은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대형 금융회사들이 이제 겨우 자본 수혈을 받기 시작했다. 뒤이어 자본 확충에 나서야 할 중소 금융회사가 수없이 많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자본 확충에 실패해 무너지는 금융회사들이 나올 수도 있다는 말로 들렸다. 이어 그는 금융권 파장이 실물경제 영역으로 계속 번지고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미국에 경제 침체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며 “다른 나라로 번질 가능성이 아주 크다”고 덧붙였다.

이미 영국과 아일랜드·스페인 등의 주택 가격이 떨어지면서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와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 가계부채가 부실화되면서 금융회사에서 일반 기업으로 돈의 흐름이 원활하게 흐르지 않고 있다. 제 코가 석자인 금융회사들이 기업에 설비·운전 자금을 빌려주기를 꺼리는 탓이다. 그 결과 세계 주요국의 경제(GDP) 성장률이 둔화하고 있다.

“여기에다 최근에는 인플레이션 압력마저 높아지고 있다. 세계 경제에 또 다른 부담이다.” 각국 중앙은행이 경기 침체를 차단하기 위해 금리를 내려야 하지만 인플레 압력 때문에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오래가면 경기와 물가 어느 쪽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할 수 있다고 그는 우려했다.
그렇다면 한국 등 아시아 경제는 어떨까. 그는 아시아 국가 간 무역 확대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아시아도 서브프라임 사태의 파장을 피해갈 수 없겠지만 최근 역내 교역이 크게 늘고 선진시장에 대한 의존도가 줄어들고 있는 게 방파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특히 중국과 인도 중산층의 소비가 아시아 경제의 버팀목이 될 수 있다.” 선진국 소비자들이 서브프라임 사태와 고유가 파장으로 씀씀이를 줄이겠지만 최근 급증하고 있는 중국과 인도 등의 수요 증가 덕분에 아시아 경제가 거친 풍랑을 헤치고 나갈 수 있을 것이란 얘기다.

한국 증시에 대해 그는 “시장을 분석하고 전망하는 게 내 일은 아니다”며 “대신 한국 자산운용 업계에 대해서는 의견을 밝힐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한 운용사에 한국 투자자들의 돈이 집중적으로 쏠린 사실을 알고 있다. 선진국에서도 한때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투자자 개인의 사정과 미래 계획 등에 따라 펀드 수요가 다양화할 것이다.” 한마디로 고객 맞춤형 펀드가 주요 상품으로 등장할 것이라는 예측이다. 이를 위해서는 업계가 신뢰성을 더욱 높일 필요가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 투자자가 돈을 오랜 기간 믿고 맡길 수 있는 곳이 돼야 한다는 얘기다.

화제를 바꿔 한국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투자은행 육성 전략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한국 금융인의 전문성과 노하우는 아주 빠르게 축적되고 있다. 우리가 한국에 자산운용사를 설립할 때 외국 전문가를 들여올 필요가 없었다. 한국 금융법규도 세계적인 수준이다. 독자적인 투자은행을 설립·운용·발전시킬 수 있는 기초 조건은 갖췄다고 본다.”

이는 국내 금융법규가 지나치게 규제투성이라고 꼬집는 다른 외국 전문가들과 반대 입장이다. 또 전망도 낙관적이다. “한국은 지리적으로 아주 좋은 조건을 갖고 있다. 앞으로 30년 안에 동북아시아가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될 것이다. 그 한복판에 한국이 자리 잡고 있다. 성공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는 “일본과 중국·서구 금융회사들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다”며 “치열한 경쟁이 예상된다”고 했다. “아시아-서구 투자은행의 제휴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동북아 내 선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뜨거워질 것이다. 결국 톱3 은행만이 제대로 살아남아 주도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투자은행은 이런 경쟁을 뚫고 나가야 한다.”

승패를 가를 핵심 요인은 무엇일까. 그는 자금 조달 능력을 강조했다. “글로벌 시장을 무대로 비즈니스하는 거대 기업들이 원하는 막대한 돈을 경쟁 투자은행들보다 적은 비용으로 빠르게 조성해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이 성패를 가를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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