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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명품 열기는 문화 콤플렉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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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호 07면

어떤 잡지에 실린 ‘속옷 대특집’이란 기획기사를 탐독한 적이 있다. 과시하기 쉬운 겉옷도 아닌 눈에 띄지도 않는 속옷에, 겉옷과 맞먹는 거액을 투자하는 심리는 무얼까? 설문에 응했던 선남선녀들 가운데 ‘아침에 고급 속옷을 입고 나서면, 하루 종일 자신감이 생기고 든든해진다’던 한 남자의 대답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한동안 그걸 따라 하려고 해 봤을 정도로. 그래, 남에게 보이지 않는 급소를 세심히 무장하고 있으니 하루 종일 든든할 수밖에!

장정일이 만난 작가 -생활 명품 에세이 펴낸 사진가 윤광준

그렇다면 속옷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건 밥벌이에 필요한 직업 분야에서건, 더 나아가 취미 영역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사용하는 모든 필수품을 소위 전 세계의 ‘명품’ 목록에서 고르고 골라 사용하는 사람은 대체 얼마나 든든히 무장을 한 것이겠는가? 단순히 구매 능력의 출중함이 아니라, 비슷비슷해 보이는 유사 상품 더미와 알고 보면 유명세일 뿐인 허접한 물건들 속에서 진정한 ‘명품’을 고를 줄 아는 안목을 가진 사람은, 남들이 보유하지 못한 초능력을 가지고 이 험난한 생을 헤쳐 나가는 중이라고 해야 한다.

일찍이 『윤광준의 생활명품산책』(생각의 나무, 2002)이란 책으로 ‘생활명품’이란 신조어를 만들어 내며 장안에 상당한 입소문을 낳았던 윤광준 선생이 이번 달에 첫 번째 책의 ‘업그레이드 서비스’작 『윤광준의 생활명품』(을유문화사)을 출간했다.
“사치품으로서의 명품은 소유와 과시를 위한 허영의 충족물이고, 생활명품은 삶의 풍요를 위해 끌어들인 좋은 물건의 충족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짜 돈 있는 사람은 브랜드와 명성에 둔감합니다. 명품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힘을 과시할 방법이 많을 테니까요. 타자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필요한 게 명품의 효용이라면, 자신의 만족을 위해 존재하는 물건이 바로 생활명품입니다. 여대생들의 ‘명품계’나 유럽의 유명 매장에서 ‘싹쓸이 쇼핑’으로 악명 높은 우리나라의 명품 열기는 ‘문화 콤플렉스’의 표출이라고 봅니다. 다시 말해 양의 문제는 해결했으나, 질적 포만감은 만들어 내지 못한 우리 사회의 결여가 그런 포식의 형태로 나타나는 거죠.”

어떤 제품이 명품이 되고 안 되고는 소개자의 강한 기호가 작용할 여지가 있다. 세상 사람 모두를 만족시킬 명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필요나 관심도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는 전혀 소용에 닿지 않는 명품도 있다. 운전면허가 없는 내게는 자동차가 그런 품목이고, 정장을 입을 일이 거의 없는지라 넥타이가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자칫하면 조소를 당하거나 동의를 구하기 까다로운 게 ‘명품’ 예찬이다.

그런데 전작에 이어지는 이번 책 역시 ‘윤광준이 소개하는 거라면’ 하고 모두들 수긍하게 된다. 거기엔 가식이나 강요와는 거리가 먼, 대화하듯 편안한 문장도 한몫하지만 “써 본 물건밖에 아는 것이 없다”는 공들인 선택과 도저한 경험이 참견꾼들의 까탈을 잠재운다.

게다가 저자가 소개하고 있는 ‘생활명품’이란 게 더러 비싼 게 있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범한 월급쟁이들이 평생을 모아도 사기 힘든 대단한 것은 없지 않은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부터도 늘 사용하던 손톱깎이를 찾지 못해 집 앞에 있는 화장품 가게로 달려가 책에 나오는 쓰리세븐777 손톱깎이를 사서 일주일째 깎지 못했던 손톱을 손질했다. 단돈 2000원이니, 크게 ‘윤광준에게 속을 일’도 없는 것이다.

“두 권의 책을 통틀어 한국산 명품은 외국산에 비해 가짓수도 빈약하고, 부가가치가 높은 축에 속하지도 않습니다. 좀 단호히 말하면, 우리나라에선 품질 좋은 물건은 만들 수 있지만 당장 국제적 명품을 만들 능력은 많이 모자란다고 봅니다. 명품은 우선 역사(전통)를 통한 지속의 힘을 갖추고 있어야 하고, 둘째로는 품질(차별성)의 우수함입니다.

오랜 세월 한 가지 물건만을 만들어 왔던 장인 혹은 전문성의 투입 여부라 말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대를 이어 가업을 잇는 경우가 희귀합니다. 명품을 완성하는 마지막 조건은 물건에서 풍기는 아우라(존재감)인데, 이건 위의 두 요소 없이는 생기지 않는 근원적인 차별 요소입니다. 또한 이 부분은 문화와 철학을 깔지 않으면 불가능한 무형의 에너지이기도 하죠.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명품의 산지가 유럽이나 선진 국가에 한정돼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명품 브랜드는 개인이나 기업의 힘만으로는 되지 않고, 한 사회의 온축된 문화적 총체가 바탕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피렌체에 소재한 이탈리아의 만년필 회사인 비스콘티가 창립한 지 10여 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세계적 명사들이 자랑하는 수집 품목이 된 것은, 피렌체가 가지고 있는 르네상스의 발원지라는 무한한 상징적 부가가치가 신생 만년필 회사에 후광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윤광준 선생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12번째 경제대국이면서도 거기에 걸맞은 명품 브랜드가 턱없이 귀한 것은 “과거의 찬란한 전통이 있더라도 현재의 역사에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절실함이 더해지고 희생이 전제돼야 원하는 물건은 내 것이 됩니다. 좋아하는 물건이 있다면 우선 저질러 놓고 나중에 해결 방법을 찾는 게 내 방식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방식이 욕망과 현실을 외려 중화시켜 놓더라 이겁니다. 저질러 놓은 것을 수습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해야 하니, 간절한 욕망부터 해결하면 나머지는 저절로 해결된다는 지론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욕망 충족법을 지켜오다 보니 이제 절실하게 필요하거나 갖고 싶은 물건도 별로 없게 되고 외려 욕망의 크기가 줄어들기 시작하더군요.

뭐든 대체하면 된다는, 대치의 관점에서 사는 인생이 쓸쓸하다는 얘기는 이래서 가능한 거죠. 난 스스로 선택한 고립의 시간을 보내는 방법으로 혼자 노는 법을 터득해 갔습니다. 명품을 의식한 게 아니라, 좀 더 세밀하게 그리고 나만의 기준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해체하는 놀이도구가 바로 물건이었던 셈입니다. 기왕이면 좋은 물건을 선택하려는 노력은 정당했고 좋은 물건은 그만큼의 대가를 돌려줬습니다.”


‘장 작가’란 줄임말로 불리는 장정일씨는 시인·소설가·희곡작가·책 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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