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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Review] ‘관용의 횃불’ 꺼지면 제국은 몰락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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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현대 사회의 미국은 800년 전 몽골 제국과 많이 닮았습니다. 유목민이었던 몽골 사람들은 심지어 글도 못 읽었을 정도로 재주가 없었지만 기술과 지식을 가진 중국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하고 활용했기 때문에 패권을 쥘 수 있었지요. 인도 과학자, 한국 음악가, 나이지리아 의사 등이 활약하고 있는 이민자들의 나라 미국과 공통점이 많아요.”

에이미 추아(46·사진) 예일대 법대 교수는 “인종·종교를 따지지 않고 인재를 끌어들여 쓴 능력이 몽골과 미국을 동시대 초강대국으로 만든 비결”이라고 강조했다. 새 책 『제국의 미래』의 한국어판 발간에 맞춰 진행한 전화 인터뷰에서다.

4년 전 미국식 세계화의 위험성을 고발한 책 『불타는 세계』(부광)로 논쟁거리를 던졌던 그가 이번에는 ‘초강대국’을 화두로 들고 나왔다. 그가 말하는 초강대국이란, 지구상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경제력·군사력을 갖고 있으면서 국제사회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력을 행사하는 나라다. 역사적으로 페르시아·로마·몽골·대영제국 등이 그 사례이고,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미국이 그 지위를 누리고 있다.

그는 이번 책에서 이들 초강대국의 흥망성쇠를 하나하나 짚어보며 공통점을 뽑아냈다. 바로 ‘관용’이다. 세계를 제패하려면 세계 일류의 인재를 끌어들여 그들의 충성심과 동기를 불러일으켜야 하는데, 그 길이 ‘관용’이라는 것이다. 역으로 초강대국의 쇠퇴는 ‘불관용’에서 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우선 그가 말하는 ‘관용’의 실체가 궁금했다.

“인권 차원의 관용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평등이나 존중과도 상관 없어요. 이질적인 사람들이 그 사회에서 생활하고 일하고 번영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로마가 그랬다. 로마는 인종차별이 없는 사회였다. 어느 지역 출신이라도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서기 98년부터 117년까지 로마를 통치했던 트라야누스 황제는 스페인에서 태어났고, 193년 정권을 잡았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아프리카 출신이었다. 로마는 이민족들이 로마제국에 대해 매력을 느끼게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탁월했다. 정복된 민족의 지도계층을 억압하는 대신 로마 문화를 권력과 특권의 수단으로 받아들이도록 유혹했다. 각 지역의 지도계층은 자식들을 로마에 있는 학교에 보냈고, 그 아이들은 자라서 충실한 로마시민이 됐다. 피부색은 물론 계층을 구분하지 않고 ‘시민권’을 부여하는 정책 역시 로마의 문화와 가치관을 확산시키는 데 효과적인 도구였다.

하지만 로마를 위대한 제국으로 만들었던 ‘관용’이, 로마를 멸망으로 이끈 ‘불관용’의 씨앗이 됐다. 추아 교수는 “로마의 붕괴는 로마가 도저히 관용할 수 없는 문화와 습관을 가지고 있는 민족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동화시키는 데 실패하면서 시작됐다”고 지적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이래 우상숭배와 이단에 대한 공격이 격화되면서 도처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또 4세기말 로마는 인종차별 정책까지 실시했다. 다른 종족 사이의 결혼을 금지하고, 입는 옷까지 규제한 것이다. 그 결과 민족간·지역간 반목과 갈등이 갈수록 깊어졌고, 로마는 빠른 속도로 붕괴하고 말았다.

미국 역시 관용을 통해 세계적인 패권국가로 성장한 나라다. 추아 교수는 “미국은 수천만에 이르는 이민자들의 활력과 재능을 유인하고 보상하고 활용했다”며 “이민자들의 능력이 미국의 성장과 성공을 추진한 원동력이었다”고 말했다. 원자폭탄과 실리콘밸리 모두 이민자의 발명품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관용’을 이토록 강조하는 데는 그의 개인사도 한몫 한다. 그의 부모는 필리핀에서 자란 중국인이다. 1961년 MIT로 유학 온 그의 아버지는 굳은 의지와 근면함으로 2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고 71년 버클리대학 교수가 됐다. 4녀 중 장녀인 추아 교수는 87년 하버드대에서 국제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아 예일대 교수가 됐고, 그의 여동생들도 예일대·하버드대 출신 의사와 변호사 등으로 미국의 주류사회에 편입했다. 또 추아 교수의 남편인 제드 러벤펠드 예일대 법대 교수 역시 유대계 미국인이다. 러벤펠드 교수는 2006년 첫 출간돼 전세계적으로 100만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 『살인의 해석』의 저자이기도 하다.

추아 교수는 『제국의 미래』 후기에서 “내 가족이 번영하고 우리 방식대로 변화하면서 미국인이 될 수 있게 해준 미국의 관용에 이 책을 바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책을 통해 미국이 자신의 성공비결 ‘관용’을 지금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그는 9·11 이후 미국의 변화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이민자를 공격하고 무슬림을 경계하는 분위기, 이라크 침공 등을 놓고 “초강대국들의 핵심 집단이 불관용으로 돌아서서 토착 문화 보호주의나 호전적인 배외주의 정책을 채택할 때, 그 초강대국은 분열과 붕괴의 길을 걷게 된다”고 걱정했다. 그는 “새 대통령이 취임해 전략적인 수정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미국이 직면한 도전은 미국의 영향력 아래 놓인 나라들에게 충성심, 하다못해 묵인이라도 확보할 수 있는 공통의 결속력을 어떻게 만들어내느냐는 문제다. 추아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9·11 이후 해외에서 세계적인 패권을 확인하려는 미국의 노력이 그 결속력을 더 약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그는 “미국이 초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중단하는 것 뿐”이라고 충고한다. 또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세계의 패권을 지키겠다는 의도를 공공연히 떠벌리고 다니는 것도 미국의 입지를 위태롭게 한다”고 꼬집었다.

그의 조언에 따른다 하더라도, 미국의 패권은 언젠가는 무너진다. 그렇다면 미국 다음 초강대국은 누가 될까. 추아 교수는 중국과 유럽연합·인도를 유력한 후보로 꼽으면서도 “이들 나라들이 강대국으로 등락을 거듭하는 가운데 초강대국은 존재하지 않는, 양극화 혹은 다극화된 세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이들 후보국들의 갖고 있는 ‘불관용’ 성향 때문이다. 인구의 92%가 자신의 정체성을 ‘한족’으로 보고 있는 중국에는 뿌리깊은 외국인 혐오와 자민족중심주의가 팽배해 있다. 유럽연합 역시 이슬람 교도에 대한 두려움과 벽 높은 이민 정책 등이 한계로 지적됐다. 상대적으로 인도는 유리한 형편이다. 16개의 공식언어와 수천개의 종교를 인정하는 다원주의 사회여서다.

한국은 어떤가. 그는 “한국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단일민족이고 민족에 대한 자긍심이 강한 나라”라고 돌려 말했다. 그의 말 속에는 한국이 초강대국의 필수조건인 ‘관용’과는 거리가 멀다는 속내가 비쳤다. 그러면서 그는 “모든 나라들이 초강대국이 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초강대국이 되면 안티세력도 생기고 테러 위험도 있고. 도리어 진저리를 칠 사람도 많을 것이다”라며 “하지만 꼭 초강대국을 향한 전략적인 관점이 아니더라도 어느 사회에서나 관용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예의바른 외교적 수사로 포장했지만, 그가 우리 사회에 던진 충고는 날카로웠다. 원제 『Day of Empire』.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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