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양자강1만리>7.제1부 중국문화의 원형을 찾아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택동(毛澤東)은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다.사후 20년.장강 탐사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드리운 그의 자취를 보면서 갖게되는느낌이었다.그의 고향인 소산(韶山)을 비롯해 낙산(樂山).장사(長沙).여산.무한.남경,그 어디를 가도 시비(詩 碑)와 함께모의 그림자가 밟혔다.죽음 뒷자락에 모를 살린 것은 그의 혁명과 정치적 경륜이 아니라 인간의 가슴을 적시는 진솔한 시인의 감수성이었다.
『모주석은 뛰어난 시인이었지요.그분의 시사(詩詞)는 중학교 국어교과서에도 실릴 만큼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모택동의 소산 고향집을 찾아가는 길에 중국학자로 탐사에 참가한 호남사범대학 채진초(蔡鎭楚)교수가 한 말이다.그는 이어 『현대시인가운데 누구도 감히 넘을 수 없는 높은 봉우리를 이룬 본격시인』이라고 덧붙였다.
모택동이 태어나고 자란 생가는 호남성 소산시 서쪽교외의 인봉산(引鳳山)자락에 있다.생가는 요(凹)자형 기와집으로 북향이다.건물 전체의 방수는 13개에 이른다.이는 모택동이 스스로 고백한 것과는 달리 그의 집안이 중농이상의 꽤 살만 한 축에 속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모가 고향을 아주 떠난 것은 34세되던 1927년의 일이다.
그후 혁명전선을 떠돌다 마침내 공산중국을 건국하고 10년의 세월을 보낸 뒤 1959년 6월,그의 나이 66세의 노인이 되어고향땅을 다시 밟았다.그날 그가 부모의 묘소와 사당을 둘러보고잠을 이루지 못하며 쓴 시가 『소산에 도착해서(到韶山)』이다.
떠나던 일 꿈같이 아득하니/지난 세월 저주스럽네/고향 떠나던32년 전/붉은 깃발 날리며 농민들 창 비껴들었고/검은 손의 반동들은/채찍 높이 들었네/장한 뜻 가진 많은 동지들 목숨 희생하며/감히 해와 달에게 새로운 하늘로 바꾸게 했네/바다같이 물결치는 벼와 콩잎들 즐거이 바라보니/온 대지에 농민영웅들 저녁 안개 속에 돌아오는 것 같네.
58년 시작된 이른바 「대약진 운동」에 대한 당내외의 거센 반발에 부닥친 모주석이 고향에 돌아와 혁명초기와 당시 정황을 그리며 읊은 것이다.또한번 혁명의 의지를 다진 셈일까.
탐사단은 모택동의 인간적 면모를 살펴보기 위해 그의 두번째 부인인 양개혜(楊開慧)의 옛집을 찾았다.악양에서 장사로 가는 길목에 있는 판창충(板倉沖)이 그곳이다.지금은 「혁명열사」 양개혜를 기념해 개혜진(開慧鎭)이라고 부른다.양개혜 는 호남제일사범 시절이래 모가 가장 존경해 마지않던 스승 양창제(楊昌濟)의 딸.1920년 양창제가 급환으로 사망한 뒤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자주 그의 집을 드나들다 당시 중학생인 양개혜와 사랑에 빠지게 됐다.당시 모의 나이 27세 ,양개혜는 19세였다.
양의 고거에는 모가 연애시절 보냈다는 시 「우미인(虞美人)」이액자에 담겨 있다.
그해 겨울 두사람은 결혼했으나 행복한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1927년 국공(國共)합작 결렬후 모는 부인 양개혜와 3명의자식을 판창에 있는 양의 집으로 돌려보내고 정강산(井崗山)으로들어갔다.1930년 10월 양개혜는 국민당정부 가 내린 제1차공산당소탕령의 와중에서 경찰에 끌려갔다 한달여만에 처형되고 말았다.양의 고향집 왼쪽 언덕받이에 열사릉으로 단장된 묘소뒤편으로 병풍처럼 곡장이 둘러쳐져 있다.여기에 『접연화(蝶戀花)-이숙일(李淑一)에게 답함』이란 모택 동의 유명한 시가 음각돼 있다. 나는 젊은 아내 양(楊)을 잃었고/그대는 남편 유(柳)를잃었으나/그 두 버드나무는 꽃솜되어/가볍게 하늘 높은 곳에 올랐네/신선되어 하늘에 올랐다는 오강(吳剛)에게/가진 것 무엇이냐 물으니/오강은 신선이 마신다는 계화주를 내네/가 련한 상아(嫦娥)는 넓은 소매 펄럭이며/만리창공에서 두 충성스런 영혼위해 춤을 추네/문득 인간세상에서/호랑이같이 사납던 반동파가/항복했다는 소식 듣고 기쁨의 눈물 뿌리니/마치 큰비되어 쏟아붓듯내리는구려.
이숙일은 모의 아내 양개혜의 처녀적 친구.시 속의 유는 이숙일의 남편 유직순(柳直荀)으로 혁명군편에 서서 싸우다 1932년 호남전투때 전사했다.
상에 모택동의 시가 처음 알려진 것은 57년1월 장극가란 시인이 창간한 시지 『시간(詩刊)』에 그의 시 18편이 실리면서부터다.『접련화…』는 당시 장사시내의 모중학교 국어교사로 있던이숙일이 『시간』에 실린 모의 시를 보고 옛날을 추억하는 글을보내자 모가 그에게 화답해 보낸 것이다.
이 시는 발표되자마자 혼란에 빠져있던 중국문예창작 방법론에 출구를 제공한 전범(典範)과도 같은 작품으로 평가됐다.당시는 백화제방(百花齊放).백가쟁명(百家爭鳴)의 이른바 쌍백방침(雙百方針)이 철회되고 반우파투쟁이라는 숙청의 열풍이 휘몰아치면서 정부가 내놓은 새로운 문예창작 방법의 진의를 놓고 문예계가 갈팡질팡하던 무렵이었다.모택동은 58년 3월,『중국시는 형식은 민가(民歌),내용은 현실주의와 낭만주의의 대립적 통일에서 출로를 찾아야 한다』고 살을 붙였다.그 의미를 몰라 어리둥절할 때문단의 원로격인 곽말약(郭沫若)이 소매를 걷고 나섰다.곽은 「혁명적 현실주의와 혁명적 낭만주의의 상호결합」이란 글을 통해 이를 가장 훌륭하게 체현한 작품이『접련화…』와 같은 시편들이라고 치켜세웠다.
현재 전해지는 모택동의 시사는 총 73수에 이른다.오늘날 중국 명승고적지 어디에서나 그의 시비를 만날 수 있다.주목되는 것은 이 시비들이 모 사망후 등소평시대에 들어와 건립됐다는 사실이다. 지난 81년 6월,중국당 제11기 6중전회에서 「역사결의」가 채택된 뒤로 모택동은 혁명가.정치가로서 역사의 책갈피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는 듯이 보인다.그러나 모택동은 이제 혁명과 인간의 원초적 정서들을 절실하게 그려낼 수 있었던 뛰 어난시인으로 중국인들의 가슴속에서 되살아나고 있음을 이번 탐사에서확인할 수 있었다.
▧ 다음회는『영혼을 투시해내는 기적의 얼굴화장술-검보(검譜)』편입니다.
베갯머리에 밀려오는 시름 어이할까 붉은 바다에 파도가 넘실 거리듯 밤은 깊고 날은 밝기 어려워 어쩔 수 없이 옷 입고 일어나 추위속에 앉았네 새벽이 와서 온갖 시름 사라졌으나 지친 몸 의지할 데 없어 서쪽으로 흘러가는 한 조각 새벽달 그를 마주하니 눈물 뿌리지 않을 수 없다오.
(堆來枕上愁何狀 江海번波浪 夜長天色總難明 無奈披衣起坐薄寒中 曉來百念皆灰盡 倦極身無빙 一勾殘月向西流對此不抛眼淚也無由) -모택동이 두번째 부인 양개혜와 연애할때 보낸 시 「우미인(虞美人)」-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