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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진실게임의 위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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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정부의 쇠고기 수입정책의 갑작스러운 변경 이후 온 나라가 진실게임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정부는 정책변경의 이유를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거나 그러한 설명에 실패하고 있다. 언론은 저마다의 시각과 관점으로 해석한 정보를 쏟아내고 있다.

과학자들조차도 과학적이지 못한 태도로 사태를 더욱 불투명하게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

진실게임에서는 진실은 사라지고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것들만 남는다. 참가자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진실을 어디까지 어떤 형태로 밝힐지 고민한다. 대개는 진실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왜곡해 진실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물론 진실 밝히기를 거부하고 미리 정한 제재를 받겠다고 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그마저도 실은 게임의 일부다. 진실에 관한 관심과 의혹을 증폭시키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진실게임은 진실에 다가서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진실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진실게임의 문제는 진실 자체가 밝혀지기 어렵다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큰 문제는 진실게임이 진실을 추구하는 방식이 될 수 없다는 데 있다. 진실게임은 참가자들 간에 서로 진실을 공유할 수 있을 만큼 신뢰하는 사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조금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그들 간의 신뢰가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신뢰할 수 있는 것은 공유 가능한 부분까지만이다. 상호 이익이 배치되어 진실을 공유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신뢰라는 전제는 무너져 버린다. 진실게임의 전제가 된 신뢰 공동체가 곧장 불신의 대결장으로 화하게 된다. 참가자 모두가 서로 진실을 왜곡한다는 의심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진실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게 된다. 진실을 함께 논의할 자격이 있는가부터 의심받게 된다.

진실은 게임을 통하여 밝혀지는 것이 아니다. 진실은 게임의 대상이 아니다. 진실을 게임 대상으로 삼는 것은 회복하기 어려운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다. 진실을 가장하여 진실 아닌 것을 진실인 양 주고받다 보면 서로에 대한 신뢰가 근본부터 흔들리게 된다. 더욱이 사사로운 비밀에 대한 관음증(觀淫症)적인 오락이 아니고 공적인 의사결정 과정에서 진실게임을 하는 것은 참가자 모두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공적인 의사결정의 대상은 공익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공동체에 속하는 구성원 모두의 이익에 관한 것이라서 진실에 기반하여 의사결정이 이루어질 것으로 누구나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적인 의사결정 과정에서 진실게임이 벌어진다면 참가자들이 느끼는 혼란과 배신감은 사적인 의사소통 과정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클 수밖에 없다.

공적인 의사결정 과정은 참가자들의 자의에 지배되지 않아야 한다. 국민으로부터 선출돼 공무를 수탁한 국가기관은 일정한 메커니즘 안에서 국가 의사를 결정하고 집행하도록 되어있다. 권한범위 내에서 절차와 형식을 준수해 이루어진 의사결정이 아니면 국가 의사가 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넘어서는 안 되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어떠한 국가기관의 자의도 사전적 사후적 통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나아가 국가기관은 시민사회의 자발적 토론의 결과물인 국민 의사를 최대한 존중하여야 한다. 현대의 실질적 민주주의 이론에 따를 때 국민 의사와 국가 의사는 피드백(feedback) 과정을 통해 수렴돼야 한다. 공적인 의사결정 과정에서 진실에 대한 관할은 국가에 전속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국가야말로 진실의 의무에 기속(羈束)되어야 한다. 진실게임은 민주국가의 품격에 맞지 않는다.

미국산 쇠고기의 전면 개방으로 인한 광우병의 발생 위험도 간과할 수 없는 중대한 위험이다. 그러나 더 큰 위험은 이를 둘러싼 진실게임에서 발생할 수 있다.

정부에 대한 불신, 언론에 대한 불신, 전문가를 자처하는 과학자들에 대한 불신, 국민 상호 간의 불신이 그것이다. 믿을 수 있고 기준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하는 모든 포스트가 불신의 대상이 된다면 누구를 믿고 따라야 하나. 자구책을 마련하기에는 역부족인 국민들로서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다. 양치기 소년들에 둘러싸인 양들처럼 국민은 패닉 상태에 시달리고 있다. 정직이 최선의 방책이다.

김선택 고려대 교수·헌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