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보이지 않는 금기 말할 수 있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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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오전 서울 삼성동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 열린 국제출판협회(IPA) 서울총회 개막식에서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터키 소설가 오르한 파무크가 기조연설을 하기 위해 연단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뉴시스]

200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오르한 파무크(56)가 11일 오후 방한했다. 12일 개막한 IPA(국제출판협회) 총회 기조연설자로 초청된 파무크는 14일까지 3박4일간 서울에 머문다. 때맞춰 그의 자전적 에세이 『이스탄불』(민음사)도 번역·출간됐다.

방한 이틀째인 12일, 파무크는 바쁜 하루를 보냈다. 이날 하루에만 5개의 공식일정을 소화했다. 일반인에게 공개된 행사엔 수백 명이 몰려들었다. 일부 서울시민은 파무크의 얼굴을 알아보고 환호를 질렀다. 가위 ‘파무크의 날’이라 할 만했다. 파무크의 하루를 좇아가봤다.

오전 8시 30분 서울 강남의 COEX. IPA 총회 개막식 직전 파무크는 이명박 대통령과 함께 차를 마셨다. 이 대통령을 만나고 나온 파무크에게 대통령의 인상을 물었다. 파무크는 “대통령이 노벨 문학상에 관심이 많은 걸 알 수 있었다”며 “소설가는 사람을 만나면 얘기하는 걸 좋아하는데 정치인은 먼저 악수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 웃으며 말했다.

이어 오전 9시 IPA 총회가 열렸다. 기조연설자로 단상에 오른 파무크는 ‘무단복제 문제’를 지적했다. 그는 “내 작품이 고국 터키에서 무단복제되는 것을 너무 많이 봤고 내 소설의 복제품을 파는 사람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저작권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에게 정말 감사한다”며 “최근엔 인터넷이 더 큰 문제”라고 꼬집었다.

그리고 오후 1시30분. 서울 강남교보문고 문화이벤트홀에서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취재진만 50여 명이 몰렸다. 몇몇 문답을 설명과 함께 소개한다.

-2005년 첫 방한했을 때와 스스로 달라진 게 있다면.

“노벨상을 받기 전엔 이스탄불에서만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매년 가을 학기에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강의도 한다. 집앞의 경찰은 더 많아졌다(웃음).”

(※2005년 서울문학포럼 참석차 첫 방한했을 때 그는 자신의 이모부가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일화를 공개했고, 이번에도 다시 강조했다. 무엇보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파무크 문학을 가장 먼저 소개한 나라이자, 가장 많이 팔린 나라다. 『내 이름은 빨강』을 비롯한 그의 저작은 한국에서 약 25만 부나 팔렸다. 그래서인지 그는 지난해 6월, 한국 언론만 특별 초청해 이스탄불 자신의 아파트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집 앞에 경찰이 경계 근무를 서는 살벌한 분위기에서 진행된 회견이었다. 파무크는 2004년 쓴 칼럼에서 1차 대전 당시 터키가 10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을 학살한 사건을 고발했고, 이 사건으로 파무크는 지금까지 터키의 민족주의자로부터 테러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 『이스탄불』을 소개한다면.

“다섯 살부터 스물두 살 때까지의 자전적 이야기이자 이스탄불 도시 전체의 이야기다. 이스탄불이란 도시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왜 아름답게 느껴지는지도 말하고 싶었다. 한편으로 작가가 된 사람이 젊은 시절에 어떤 분노와 고민, 번뇌를 겪으며 살았는지에 대한 수기이기도 하다.”

(※유럽에서 파무크는 ‘터키 작가’라기보단 ‘이스탄불 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제임스 조이스 하면 더블린을 떠올리고 카프카 하면 프라하를 연상하는 것처럼 말이다. 파무크는 이스탄불에서 태어났고 성장했다. 7편의 장편소설 중 6편이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삼는다. 스웨덴 한림원은 2006년 “파무크는 고향인 이스탄불의 음울한 영혼을 탐색해 가는 과정에서 문화간 충돌과 복잡함에 대한 새로운 상징을 발견했다”며 파무크의 손을 들어줬다.)

-현재 당신의 작품은 56개 국가에 번역·소개돼 있다. 작품의 어떤 요소가 언어와 문화의 경계를 뛰어넘게끔 한다고 생각하는가.

“흥미로운 건, 나라마다 많이 팔리는 작품이 다르단 사실이다. 『내 이름은 빨강』은 한국과 중국에서, 『눈』은 유럽과 미국에서 많이 팔린다. 이번에 한국에 번역된 『이스탄불』은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인기가 높다. 아마도 『눈』은 미국이 이슬람주의에 관심이 많아서일 테고, 『이스탄불』은 스페인 사람이 겪었던 어린 시절과 비슷한 내용이 나와서일 것이다. 『내 이름은 빨강』은 한국과 중국 사람이 예술에 관심이 높아서 때문이 아닐까?”

기자간담회가 끝나자마자 독자 사인회가 열렸다. 강남교보문고 1층 매장에 200여 명이 긴 줄을 섰다. 파무크는 부지런히 사인하고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파무크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던 건, 뒤이어 열린 ‘황석영과의 대담한 대담’이었다. 오후 4시, 같은 건물 23층 강당에서 진행된 대담장은 인파로 가득했다. 좌석 400개가 꽉 찼다.

좌담 주제는 ‘경계와 조화’였다. 세계 변방의 두 나라, 터키와 한국을 대표하는 두 소설가의 좌담 주제로서 안성맞춤이었다. 파무크가 “작가라면 보이지 않는 경계와 금기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자 황석영은 “서구가 일방적으로 던져준 규칙과 문법에 얽매여선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 파무크는 13일 오후 4시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공개 강연회를 연 뒤 14일 오후 출국한다.

손민호 기자

◇오르한 파무크=1952년 터키 이스탄불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이스탄불의 명문고를 졸업했고, 이스탄불 공과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어릴 적 꿈은 화가나 건축가. 그러나 스물세 살에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82년 첫 소설 『제브데트씨의 아들들』을 출간했고, 85년 발표한 세 번째 소설 『하얀 성』이 ‘동양에 새로운 별이 떠올랐다(뉴욕 타임즈)’는 격찬을 받으며 국제적 작가로 거듭났다. 이어 발표한 『검은 책』(1990) 『새로운 인생』(1994) 『내 이름은 빨강』(1998)이 잇따라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마침내 2006년 스웨덴 한림원은 그의 손을 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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