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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빙하 갈아 만든 팥빙수 맛이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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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호 13면

동료 대원이 세종기지 앞바다를 배경으로 찍어준 사진. 이상훈씨는 “남극은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 정도로 자외선이 강해 야외에선 절로 얼굴을 찌푸리게 된다”고 말했다. 이상훈씨 제공

‘남극 주방장’의 임무는 5월에 시작된다. 기지 근무는 12월에 시작하지만 1년치 식재료를 준비해서 미리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9월에 냉동 컨테이너를 배로 보내면 12월께 도착한다. 대원 17명이 1년 동안 먹을 식량에, 여름철(12~2월)에 체류하는 연구원 등 방문객 40여 명까지 고려해야 하니 식재료의 양이 엄청나다. 그래서 5월부터 목록을 작성한다.

People 세종기지 조리장 마치고 돌아온 이상훈씨

“(식재료가) 한번 가면 끝이거든요. 계산을 잘못하거나 빠뜨리고 나면 더 못 구하죠. 채소·과일만 여름에 칠레 공군기 편으로 조금 구입하고…. 해마다 똑같이 구입하면 되지 않느냐고요? 조리장마다 잘하는 요리도 다르고, 대원들 식성도 달라서….”
해마다 빠지지 않는 건 김치·삼겹살·소주다. 추위를 달래는 고칼로리에, 향수를 달래는 그리운 맛이다. “김치 3t, 삼겹살 1t…그 정도는 준비해 갑니다.”

이상훈씨가 남극 기지에서 조리장으로 일하던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 부산=송봉근 기자

t단위의 음식을 보관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남극 기지에는 세계 최대의 냉동 시설이 있기 때문이란다.

“얼마나 편한데요. 기지 문을 나서기만 하면 돼요. 주변에 잔뜩 만들어 놓은 선반 위에 턱 얹으면 끝이지요.” 추운 날씨를 ‘천연 냉동고’라고 자랑하며 이씨가 씩 웃는다.
 
명절엔 ‘전기장판 막걸리’

꼼꼼히 준비해 가도 막상 현지에선 아쉬운 것이 생기기 마련이다.
“돌솥밥을 하려니까 돌솥이 없고, 막걸리를 담그려니까 누룩이 없고….”
누룩 없이 막걸리를 담가 봤지만 “색깔은 막걸린데 맛은 구정물”이었다. 몇 번을 시도해도 누룩 없이는 ‘식초 수준’을 넘지 못했다. 이씨가 처음으로 남극에 갔던 2005년 얘기다. 그는 2005년과 2007년, 두 번 조리장을 맡았다.

두 번째 근무 때는 돌솥 스무 개와 누룩을 챙겨갔다. 술을 담글 때 온도를 맞춰주는 기계는 구입 허가를 받지 못해 전기 장판으로 덮어놓고 온도를 조절해 가며 막걸리를 담갔다. 이번엔 대원들이 다들 술잔을 흔쾌히 비웠다. 막걸리는 수송과 장기 보관이 어렵다고 한다. 1년만 참지, 굳이 전기장판 옆을 지켜가며 만들 것 까지야.

“추석이나 설이면 얼마나 가족이 보고 싶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명절이면 막걸리를 빚고 도토리묵을 쑤었고, 대원들은 맛있게 그 음식을 먹었다.

세종기지에서 월동을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생전 처음 만나는 남자 열 일곱 명이 함께 1년을 보내야 한다. 혹한과 위험 때문에 대개는 기지에서 5분 거리를 못 벗어난다. 가족도 친구도 만날 수 없다. 먹는 즐거움이 큰 비중을 차지할 수밖에.

“오전 7시, 낮 12시, 오후 6시. 하루 세 번 식사 시간에는 단 한 사람도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블리자드(눈폭풍)를 뚫고서라도 옵니다.”

방문객이 많은 여름이면 60인분을 하루 세 번 준비해야 하는데 혼자 할 수 있을까.

“월동대 주치의가 평소엔 주방 보조로 일합니다. 대원들이 건강하니까 별로 일이 없거든요. 귀국할 때쯤이면 초보 요리사 정도 실력은 갖춘다니까요.”

의사를 ‘주방보조’로 쓰는 요리사가 또 어디에 있겠느냐며 그가 큰 소리로 웃었다.
이씨의 가장 큰 고민은 단조로운 기지 생활에서 어떻게 음식으로 즐거움을 줄 수 있을까였다. 대원들의 생일 파티는 기본. 우루과이 기지에서 배운 실력으로 남미식 숯불구이 파티를 열었다. 가격표와 메뉴판·웨이터를 갖추고 ‘레스토랑 이벤트’도 했다.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주방에 쪽지를 남기라고 했어요. ‘김치찌개가 먹고 싶다’고 한 줄 썼더군요.”

그날 저녁 남극 식당엔 김치찌개가 나왔다. 이름 모를 그 대원은 가슴이 따뜻해졌을 것이다.

“요즘도 가끔 대원들이 전화해요. ‘형 음식 생각난다’ ‘미역국 맛 타박하다가 부부싸움했다’고요. 남극에서 못 먹는 음식은 거의 없어요.”

반기문 사무총장도 반했다

남극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없을까. 이씨는 만년빙수, 톡톡얼음, 시료 초밥을 별미로 꼽았다. 남극의 빙하로 만든 팥빙수는 기지 방문객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하다.
“기지 앞바다로 떠내려오는 빙하를 포크레인으로 건져요. 그걸 빙수 기계에 갈아서
만들죠. 팥은 제가 삶고요.”

대원들은 그가 만든 달콤한 팥을 싸가지고 나가 갓 내린 새하얀 눈밭 위에 뿌려 손으로 떠먹는다. 남극에 내리는 눈은 불순물이 없어 그대로 받아 물 대신 마실 수 있을 만큼 깨끗하다.

수십만 년 동안 남극에 내린 눈이 쌓여 만들어진 만년빙(萬年氷)에는 고대의 공기가 그대로 담겨 있다. 이 얼음을 위스키에 넣어 먹으면 기포가 톡톡 터지는 소리가 나면서 고대의 공기층이 흘러나온다. ‘만년 온더록’인 셈이다.

“남극 생선으로 만든 초밥이 진짜 맛있죠. 바다가 차가워 그런지 육질이 정말 쫀득쫀득합니다. 처음 회 떴을 때부터 다 먹을 때까지 살이 조금도 늘어지는 기운이 없어요. 비교가 안 돼요. 그런 고기는 처음 봤습니다.”

일식 요리사답게 이씨가 목소리를 높인다. 남극조약에 따르면 연구 외의 목적으로 풀 한 포기라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 그런데 초밥이라니.
“일년에 네 번 정도, 연구원들이 남극 물고기가 중금속에 오염됐는지를 조사합니다. ‘시료(試料) 채취’라고 하죠. 내장만 검사하기 때문에 버리는 생선 살은 제가 요리합니다.”

지난해 11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세종기지를 방문했을 때도 ‘시료 초밥’을 대접할 수 있었다. 고된 일정 때문에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던 반 총장이 그날은 그릇을 몇 번이고 비웠다. “아주 맛있었다면서 제 조리장 모자에 사인을 해주고 가셨습니다.”

오늘도 남극 갈 준비합니다

이씨는 복어까지 다루는 정통 일식 요리사다. 2004년 12월 처음 남극으로 떠나기 전에는 해운대에서 요리사 8명을 두고 250석 규모의 일식집을 운영했다.

“정말 우연이었어요. 단골 손님 중에 신진호씨라고, 의사 분이 계셨거든요. 2004년 3
월에 손을 베어 그분께 치료받으러 갔는데, 약력에 ‘제5차 세종기지 월동대 주치의’라고 적혀 있더라고요.”

‘월동대 주치의’가 뭐냐고 물었을 뿐인데, “남자라면 한 번은 가봐야 한다. 조리장도 뽑는다”며 신씨는 열변을 토했다. 서류 준비며 추천서까지 신씨가 도맡아 줬고, 그해 5월 합격자 발표가 났다.
“아내(34)는 농담인 줄 알더라고요. 훈련하고, 가게 정리하고, 몇 달이 지나니까
‘진짜 가느냐’고 하더군요.”

당시 그의 나이 서른다섯. “더 나이 들기 전에 가 보고 싶다”고 아내를 설득했다. 다행히 연봉은 전문 경력에 맞춰주고 극지 근무수당이 있어 수입이 줄진 않았다.
남극까지 가는 데만 꼬박 열흘이 걸렸다. 처음엔 낯설고 두려웠다. 건혁(7)·건한(5) 두 아들도 보고 싶었다. 아내가 아플 때면 누가 병원에 데려갈까 싶어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그는 2006년 돌아오자마자 두 번째 남극행을 지원했다.

“공기가 너무 맑아요. 남극에서 처음 스키를 타봤는데 바다와 빙하를 보면서 내려오는 그 기분이…. 휴대전화도 없고, 아스팔트도 없고, 아름답고, 깨끗하고…. 꽁꽁 언 바다를 걸어서 건너는 걸 남극 아니면 어디서 해 보겠습니까.”

세종기지 근무는 2년 연속으로 할 수 없다. 2005년, 2007년 근무했던 이씨는 앞으로도 2년에 한 번씩 남극에서 근무하고 싶다고 했다. 그가 남극에 다녀온 2006년부터 전공인 일식 이외에 다른 요리를 배우는 데 힘을 쏟는 이유다. 1년 남짓 전 대원의 식사를 혼자 책임지는 남극 조리장의 미덕은 ‘다양하고 맛있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대원들의 생일 케이크를 잘 만들기 위해 제과·제빵을 배웠고, 소문난 음식점을 찾아가 무보수로 일해주고 비법을 가르쳐 달라 청했다. 이씨가 남극 근무 환경을 설명하면 음식점 주인들은 흔쾌히 응해준다. 이번에도 귀국하자마자 물회로 유명한 음식점을 찾아 보름간 일해주고 양념장 비법을 배웠다.

“칠레 기지처럼 가족을 데리고 가 근무할 수 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남극을 다녀온 사람은 두 종류라고 한다. “다시는 안 가겠다”는 사람과 평생 남극을 그리워하는 사람. 서른다섯에 처음 남극 땅을 밟은 젊은 요리사는 ‘남극병’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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